“통일보다 평화적 공존” 63%… 이념 장벽 허문 ‘실용 대북관’ [연중기획-더 나은 미래로]

북한·통일에 대한 국민 인식 변화

‘통일 필요성’ 49% 응답 역대 최저
‘평화적 공존 동의’ 비율은 최고치
‘적대적 공존’ 선호도 47%로 급증
국민 69% “남북 정상회담은 필요”
경제·스포츠·문화 교류 찬성 높아

진보·보수 이념 따른 인식차 희석
北 ‘두 국가론’·핵 무력화 주요 요인
美·中 경쟁 속 한반도 의제 후순위
협상·제재 교차 기존 대북정책 한계
국민 대북 인식 전환에 부응 못해

통일연구원(KINU)이 지난해 12월 발표한 KINU 통일인식조사 2025(전국 만 18세 이상 성인남녀 1000명 대상 실시) 결과는 통일 필요성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점차 낮아지는 추세임을 보여준다.

조사에 따르면 ‘통일이 얼마나 필요한가’에 대해 ‘필요하다’(약간 필요·매우 필요)고 응답한 비율은 49.0%였다. 2014년 조사 이래 역대 최저치다. ‘평화적으로 공존할 수 있다면 통일은 필요없다’는 평화적 공존에 동의하는 응답은 63.2%였다. 2016년 해당 문항이 조사에 포함된 이래 최고치를 기록했다. ‘통일보다 지금처럼 분단 상태로 지내는 것이 낫다’는 ‘적대적 공존’에 동의하는 비율은 47%로, 2018년(27%)보다 20%포인트 증가했다. 평화적 공존과 적대적 공존에 모두 동의한 응답자 비율은 41.0%에 달했다. 국민 10명 중 4명이 ‘평화’와 ‘적대’라는 상반된 남북관계 방식을 동시 수용한다는 의미다.

2000년 6월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북한 평양 순안공항에서 만나 인사를 나누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론’ 공식화,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 심화 등 대외 환경의 악화 속에서 국민의 통일, 북한 관련 인식이 과거와 상당히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결과다. 진보, 보수의 이념에 기반한 인식차가 흐릿해지는 양상도 뚜렷하다. 국민은 통일이 덜 필요하다고 느끼는 대신 북한과 ‘상황 관리’와 ‘평화적 공존’이라는 실용적 해법에 주목하고 있다.



◆이념 넘어 남북 공존·대화 공감

남북한 공존에 대한 선호도는 이념 성향과 무관하게 폭넓게 공유되고 있다. 평화적 공존을 지지한 비율은 진보 62.8%, 중도 61.7%, 보수 65.2%였다. 적대적 공존에 동의하는 비율은 각각 49.1%, 48.1%, 43.8%로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박주화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상당수 국민이 분단의 적대적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그 상황에서 갈등을 줄이고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남북정상회담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도 높았다.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의 정상회담 필요성에 대해 찬성이 69.4%, 반대가 30.6%를 기록했다. 지지정당별 응답을 살펴보면 더불어민주당 81.8%, 무당층 64.3%, 국민의힘 53.4%가 찬성했다. 지지정당별로 차이는 있지만 과반 지지가 형성돼 있다.

‘정치·군사적 대결상태에서도 경제 교류·협력을 지속해야 한다’는 데 찬성하는 응답은 53.8%로 절반을 넘었다. 국민의힘 지지층에서도 반대(30.6%)보다 찬성(46.6%)이 높았다. 스포츠·문화·인적교류는 2015년부터 2025년까지 대체로 70% 안팎의 높은 찬성을 유지했다. 지난해 찬성 응답은 67.2%로, 여러 교류 형태 중 찬성률이 가장 높은 분야다. KINU는 조사 결과에 대해 “진보층이 북한과의 관계 회복 그 자체를 선호한다는 인식은 이제 현실에 잘 부합하지 않고, 보수층이 북한에 대한 강경 대응과 적대적 전략을 무조건 선호한다는 인식도 이제 시효가 만료됐다”며 “진영과 무관하게 북한과의 화해와 평화가 한국의 민주주의와 경제에 어떠한 이익을 가져다줄 것인지가 관심”이라고 해석했다.

◆통일→공존, 변화 이유는

북한과 통일에 대한 국민 인식은 한반도 안보 환경의 구조적 변화와 궤를 같이한다. 주요 요인은 크게 세 가지가 꼽힌다.

첫째,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론’ 공식화와 핵보유국 지위 법제화다. 핵을 이미 보유한 북한이 핵·미사일 역량을 지속적으로 고도화하는 상황에서 비핵화를 목표로 한 압박이나 대화 모두 실질적 성과를 내기 어렵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김 위원장은 지난 2월 9차 당대회에서 “한국을 가장 적대적인 국가로 공인한다”는 등 적대적 두 국가 기조를 재확인했다. 통일 지향보다는 긴장 관리와 현상 유지에 초점을 두는 시각이 힘을 얻는 배경이다.

둘째, 미·중 전략경쟁의 심화다. 양국이 자국의 핵심 이익과 우선순위가 높은 의제에 집중하면서 한반도 의제는 후순위로 밀리고 있는 게 현실이다.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사회 공조가 약화된 가운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북·러 협력이 강화되면서 제재의 실효성도 떨어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외교·안보 환경 전반의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북핵 등 한반도 문제에서 단기적 해법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인식도 확산하는 모습이다.

셋째, 우리 정부의 대북정책 성과가 한계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남북정상회담과 경제·문화분야 교류 확대 등 일정한 성과도 있었지만 결국 북한의 핵 개발을 막지 못했고 남북관계는 단절 국면에 접어들었다. 협상과 제재가 교차된 정책 경험이 실질적 성과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평가가 축적된 것은 이념에 따른 대북 인식 차이도 점차 희석되는 이유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 개막식에서 남북 선수단이 한반도기를 들고 함께 입장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인식변화 부응 못하는 대북정책

국민 인식 변화는 북한을 ‘통일의 대상’보다 ‘공존, 관리의 대상’으로 보는 접근법을 요구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변화가 쉽지 않다. 정치권과 정책 결정 과정에서 관성에 기반한 접근이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특히 보수 진영이 북한과의 대립과 긴장을 통해 결집하려는 경향이 있다”며 “남북관계가 정치적으로 활용되는 구조가 이어지는 이유”라고 진단했다. 이어 “통일 문제 역시 국가 간 관계 성격이 강화된 상황인데도 여전히 민족 중심 담론에 머물러 있다”며 “남북을 내부적으로는 특수관계, 외부적으로는 국가 간 관계로 보는 이중적 인식을 인정하는 것부터가 출발점”이라고 강조했다.

‘통일을 바라보는 사고의 틀이나 인식 전환’이 사회 주요 의제로 부상할 만큼의 관심과 주목도가 충분하지 않은 것도 문제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전반적으로 통일, 북한에 대한 관심 자체가 낮아졌고 특히 젊은 층일수록 그런 경향이 강하다”며 “북한이 ‘말썽이나 안 부렸으면 좋겠다’는 인식이 국민 절반가량에 깔려 있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북한에 대한 국내 여론이 악화한 현 상황에서 접근 방식 변화를 추진하는 게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