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바이든 오토펜’ 조롱 어디까지…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미국 백악관에는 ‘웨스트 콜로네이드’(줄지어 늘어선 기둥)라고 불리는 공간이 있다. 대통령 부부가 거주하는 관저와 ‘웨스트 윙’(대통령 집무실)을 연결하는 통로 및 그 주변 공간을 뜻한다. 2025년 1월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후 이곳에 이른바 ‘대통령 명예의 복도’가 조성됐다. 역대 대통령들 사진과 그 주요 업적이 정리된 기념패를 재임 순서대로 벽에 죽 붙인 것이다. 그런데 트럼프 전임자인 민주당 소속 조 바이든 전 대통령 얼굴은 없다. 바이든 사진이 있어야 할 자리는 엉뚱하게도 ‘오토펜’(autopen·자동 서명기) 이미지가 차지했다.

 

미국 백악관에 내걸린 역대 대통령 사진들. 제45대(2017년 1월∼2021년 1월)와 47대(2025년 1월∼현재)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의 얼굴 사진 왼쪽에는 원래 46대(2021년 1월∼2025년 1월) 대통령 조 바이든 얼굴 사진이 있어야 하지만 트럼프의 지시로 그 자리를 오토펜(자동서명기) 사진이 대신하고 있다. 게티이미지

왜 그럴까. 트럼프는 80세를 넘긴 고령의 나이에 대통령 직무를 수행한 바이든이 주요 문서에 자필로 서명하는 대신 오토펜에 의존했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실제로 트럼프는 취임 후 “바이든 임기 중 단행된 특별사면은 모두 무효”라는 주장을 폈다.

 

특사의 경우 관련 서류에 대통령이 직접 서명해야 효력이 발생하는데, 바이든은 오토펜을 사용했다는 것이 이유다.

 

트럼프는 2025년 10월 팸 본디 법무부 장관에게 ‘오토펜으로 서명한 서류를 근거로 한 사면은 법적으로 무효가 아닌지 조사하라’는 명령까지 내렸다. 최근 본디 장관이 전격 경질된 것을 보면 트럼프에게 만족스러운 답변을 제시하지 못한 듯하다.

 

지난 3월19일 미·일 정상회담을 위해 백악관을 방문한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백악관에 내걸린 역대 대통령들 사진을 보던 중 웃음을 터뜨리고 있다. 다카이치가 손으로 가리킨 액자 속에는 원래 조 바이든 전 대통령 얼굴이 있어야 하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바이든을 조롱하는 의미에서 오토펜(자동서명기) 이미지로 대체했다. SNS 캡처

지난 3월 취임 후 처음 미국을 방문해 백악관에서 트럼프와 정상회담을 한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일본 총리는 숱한 화제를 뿌렸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대통령 명예의 복도를 살펴보던 중 바이든을 대체한 오토펜 이미지를 보고 폭소를 터뜨린 장면이다. 바이든을 모욕하려는 트럼프의 의도에 정확히 부응한 셈이다. 미국의 트럼프 핵심 지지층인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진영은 다카이치에게 열광했다. 반면 일본 국내에선 “나중에 민주당이 집권하면 어쩌려고 그랬느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6일 백악관에서 부활절 행사가 열렸다. 해마다 부활절이면 미국 대통령 부부는 어린이들을 백악관으로 초청해 잔디밭 위에서 달걀 굴리기 의식을 주관하는 것이 전통이다. 트럼프도 이 같은 관행을 지켰는데, 행사 도중 옆에 앉은 어린이들에게 사인을 해주며 “이베이에서 2만5000만달러(약 3800만원)에 팔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방송 카메라에 포착됐다. 어디 그뿐인가. 트럼프는 “바이든 같았으면 오토펜으로 사인했을 것”이라며 또 전임자를 헐뜯었다. 굳이 애들 앞에서, 더욱이 부활절을 맞아 할 말은 아닌 듯하다. 트럼프의 ‘바이든 오토펜’ 조롱이 과연 언제까지 계속될지 안쓰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