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이란이 임시 휴전과 호르무즈해협 개방에 합의하면서 정부가 갇혔던 우리 선박들이 운항할 수 있도록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총 원유 1400만배럴을 실은 유조선 7척이 국내에 도달하면 원유 수급난에 허덕이던 정유업계도 다소 숨통이 트일 전망이다. 다만 통항이 재개되더라도 공급망이 완전히 회복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한 데다 외교와 안전 문제도 말끔히 해소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는 8일 “금번 휴전 합의로 호르무즈해협 통항 재개를 위한 여건이 마련된 만큼 정부는 우리 선박의 통항이 조속히 이뤄질 수 있도록 선사와의 협의 및 관련국과의 소통을 가속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구체적인 통항 방식과 조건 등에 대해서는 관련국과의 소통을 통해 면밀히 파악해나가고 있다”며 “통항에 필요한 선박 리스트 등 제반 사항에 대해서도 선사와 긴밀히 협의하며 신속히 재점검해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현재 호르무즈해협에 발이 묶인 우리 선박은 유조선 7척을 포함해 총 26척이다. 해협에서 나오지 못한 한국인 선원은 우리 선박에 136명, 외국 선박 11척에 37명으로 총 173명이다. 산업통상부는 “외교부?해양수산부와 협의하며 우리 유조선의 신속하고 안전한 통항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해수부는 이날 선사들과 대책회의를 열고 호르무즈해협 통항 관리에 관한 사항과 선사의 통항 계획·방식 등을 논의했다.
일단 호르무즈해협 내 우리 선박의 통항 계획은 선사가 자체적으로 수립해 운항하기로 결정했다. 선사들은 관련 국가의 통항 방식과 외국 선박의 해협 통과 상황 등을 지켜보며 시기를 조율한다는 방침이다. 해수부는 운항 전 과정에서 실시간 안전 정보를 제공하고 선박 모니터링을 시행한다. 운항 중 기술적 문제 발생 시 원격 기술지원 체계를 가동하고, 비상 상황에 대비해 해양경찰청이 연안국 수색구조기관과 협조체계를 유지한다.
정유업체를 비롯한 산업계에서는 안도와 반가움이 교차했다. 현재 국내 정유사가 중동에서 들여오는 물량 상당수가 호르무즈해협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중동을 지난 유조선이 국내에 오기까지 걸리는 기간은 대략 20일인 만큼, 이번주 안으로 통항이 재개되면 이달 중 원유 수급이 재개될 것으로 기대된다. ‘4월 위기설’도 한고비 넘기며 유가 안정화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현장 상황을 주시하는 동시에, (통항을 허가할) 정부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며 “(호르무즈해협이) 뚫리기만 하면 국내 석유 유통에 숨통이 트일 것”이라고 말했다.
선박 추적 업체 케이플러에 따르면 우리 선박을 포함해 현재 걸프 해역에 묶인 선박들은 석유화학 제품·바이오 연료 운반선 208척, 원유 운반선 97척 등을 포함해 800척이 넘는다. 해협 밖에도 200여척이 대기 중이다.
다만 양측의 휴전 합의 발표에도 해협 통행에 관한 세부 사항은 여전히 불확실하다. 해상 추적 서비스 마린트래픽에 따르면 휴전 후 처음으로 그리스와 라이베리아 선박 각 1척이 해협을 통과하긴 했으나 안심할 수 없다. 한 해운업계 관계자는 “지금은 상황을 낙관할 때가 아닌, 정부 대응과 외교·안전 조치를 주시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항로 안전이 확인되기 전까지 움직이기는 사실상 어렵다는 설명이다. 선박이 몰리면서 병목이 불가피한 데다 통제된 통항 절차도 변수로 꼽힌다. 또 다른 해운업계 관계자는 “해협이 열리더라도 한꺼번에 배가 몰리면 통과 자체가 지연될 수밖에 없다”며 “정상적인 물류 흐름으로 돌아가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수에즈운하와 호르무즈·말라카해협을 거치는 한국 해상운송로를 점검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재 국내 기업 상당수가 기존 해상운송로를 상수로 둔 채 수출입 전략을 짜고 있다. 대체 항로를 제대로 준비해두지 않은 탓에 나라 전체가 에너지 고갈 공포와 수출 운임 급등 공포에 시달렸다는 것이다. 길은선 산업연구원 인구전략연구실장은 “이제 수출 기업은 미래 대체 경로까지 고려한 장기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며 “(필요하다면) 글로벌 생산 거점 재설계까지 염두에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