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에 노무현정부 청와대에서 국정상황실장을 지내고 3선 국회의원과 강원도지사, 국회 사무총장 등 한국 정치와 행정의 굵직한 자리를 두루 거쳐 자칭 ‘패러다임 디자이너(PD)’로 변신한 이광재의 말이다. 그는 어쩌다 패러다임 디자이너가 됐을까. 2024년 12·3 비상계엄 사태 직후 거리로 쏟아져 나온 2030세대를 본 게 계기였다고 한다. “당시 크리스마스 이브 광장에 모인 청년들이 내건 집회의 이름은 ‘다만세’, 즉 ‘다시 만드는 세상’이었는데, 그 순간 확신했어요. ‘젊은이들에게 희망이 있구나. 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운동장을 만들어 주면 된다’고.” 6?3 지방선거에 여권의 유력 강원도지사 후보로 꼽히던 그가 일찌감치 불출마를 선택하고 중소벤처기업부 신설 중소·벤처·소상공인 민관 정책협의회 공동위원장을 맡은 이유이기도 하다. 미래 세대를 위해 벤처와 인공지능(AI) 중심으로 새 판을 짜야겠다고 구상했단다. 김대중?노무현정부가 정보기술(IT)로 경제 위기를 돌파했듯이 지금은 AI 혁명을 축으로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을 설계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이다.
중소·벤처·소상공인 민관 정책협의회는 산업 현장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걷어내고 실효성 있는 지원책을 이끌어내기 위한 정책 조정 창구다. 이 위원장은 네이버 대표 출신의 한성국 중소벤처기업부 장관과 함께 민관 정책협의회를 이끌고 있다.
ㅡ명함에 ‘패러다임 디자이너’로 소개한 게 눈에 띈다.
“계엄 직후 집회에 참여한 청년들을 보면서 이들에게 벤처라는 새로운 놀이터를 만들어 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AI로 인해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열린 시대에 이 무기를 가장 잘 쓰는 사람은 청년일 수밖에 없다. 미국에선 지난 20년간 ‘매그니피센트 7’(미국 상위 7개 거대기술 기업) 같은 혁신기업이 탄생했지만 우리는 네이버, 카카오, 셀트리온밖에 나오지 않았다. 유럽도 세계적인 플랫폼 기업 하나 없이 혁신에서 뒤처졌는데 우리도 그 전철을 밟을지, 아니면 AI라는 무기를 쥐고 도약할지 갈림길에 서 있다. 청년에게 기회를 주는 디자인을 하고 싶다.”
―공동위원장을 수락한 배경은.
“결국 벤처에서 미래가 나오는데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은 (부처 의전) 서열이 18번이잖아요. 기술은 금융과 만나야 현실이 될 수 있지만 (이를 가로막는 한국식) 금융이라는 높은 벽이 있고, 조세 문제는 국회 재정경제기획위원회를 설득해야 하는 등 난관이 많다. (부처 서열이 낮은) 한성숙 장관의 서포터즈(지원군)가 돼야겠다고 생각했다.(웃음)”
ㅡ우선적으로 추진 중인 과제는 무엇인가.
“패러다임 디자인은 기존의 산업화, 민주화를 넘어 성장의 과실이 국민의 삶과 연동되도록 해야 한다. ‘유령 국내총생산(GDP)’이라는 말처럼 경제가 성장해도 국민의 삶은 나아지지 않을 수 있다. 대기업 공장도 대부분 해외에 있기 때문이다. 좋은 일자리는 대기업과 중견기업에서 나오는데, 한국에선 중소기업이 일정 규모를 넘으면 각종 지원이 끊기고 규제가 쏟아지니 기업들이 고의로 기업 쪼개기를 한다. 저는 중소기업이 규제 탓에 중견기업으로 성장하려고 하지 않는 ‘피터팬 증후군’을 없애는 데 집중하려고 한다. 그래야 새로운 좋은 일자리들이 나온다.”
ㅡ납품대금 결제 구조 문제도 지적했는데.
“저는 늘 ‘돈이 일하게 하라’고 하는데 지금은 돈이 일을 안 한다. 묶여 있다. 최대 60일 내 결제가 일반적이고 2·3차 협력사로 갈수록 대금 지급이 더 늦어져 1~2년씩 지연되는 경우도 있다. 이건 경제가 숨 막히는 구조다. 납품받자마자 돈을 받으면 이자 낼 필요도 없고, 그 돈으로 다른 투자나 사업을 할 수도 있다. ‘즉시 결제’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본다. 기술은 이미 있다. 블록체인이나 핀테크를 활용하면 바로 할 수 있다. 대신 납품대금을 빨리 지급하는 기업에 확실하게 인센티브를 주면 된다. 이건 상생의 문제다. 돈의 속도를 높이면 경제 체질이 바뀐다.”
ㅡ벤처·중소기업의 기술을 보호하려면 어떤 방안이 좋을까.
“결국 기술이 보호돼야 인수합병(M&A)도 일어나고 기업에 투자가 붙는다. 그런데 기술 탈취 사례가 너무 많다. ‘누가 이걸 제대로 판단해 주느냐’는 문제부터 개선해야 한다. 현재 법원 시스템으로는 한계가 크고 ‘기술 법원’을 따로 둬야 한다. 부산이나 대전 같은 곳에 거점을 두고 전문 판사와 시스템을 갖추는 거다. 이런 법원이 만들어지면 기술특례 상장도 쉬워진다. 지금은 신뢰할 수 있는 평가와 판정 시스템이 없기 때문에 기술특례 상장을 할 때마다 ‘매출이 있냐 없냐’, ‘기술이 진짜냐’는 논쟁이 반복된다. 기술을 지켜주고 제대로 평가해 주고, 그걸 시장에서 인정해 주는 구조를 만드는 출발이 기술 법원이라고 본다.”
ㅡ국부펀드 투자를 강조하고 있다.
“노무현정부 시절 삼성전자와 함께 미국 벨연구소 인수를 추진했고, 현대자동차가 크라이슬러, 두산은 웨스팅하우스를 사려 했던 적이 있다. 모두 이뤄지지 못했다. 만약 우리가 그때 웨스팅하우스를 샀다면 원자력 분야에서 세계 최강이 됐을 것이고, 벨연구소를 샀다면 IT 분야에서 세계적 수준의 특허를 갖게 됐을 거다. 지금은 AI를 포함해 자체 기술 개발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최소 1조~2조원을 과감하게 집행할 수 있는 메가펀드가 필요하다. 기술은 부족하지만 자본이 많은 중동이나 해상풍력에 강한 노르웨이 국부펀드와 연합해 수천조원 규모의 펀드를 만드는 거다. 미국 등이 수천조원을 쏟아붓는 ‘쩐의 전쟁’에서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연합군 전략이 필요하다.”
ㅡ신생아에게 1억원씩 주자는 주장도 파격적으로 들린다.
“그냥 현금을 주자는 게 아니라 그 돈을 국부펀드에 넣어서 굴리자는 거다. ‘사회가 깔아주는 안전망’인 셈이다. 서커스 곡예사도 밑에 그물이 있어야 뛰지 없으면 못 뛴다. AI 시대에는 도전과 혁신이 중요한데 최소한의 안전망이 있어야 청년들이 과감하게 도전할 수 있다. 과거처럼 보조금 주고 끝나는 게 아니라 투자로 연결해서 국민에게 돌아오게 하는 구조다. 재원도 국가가 가진 자산과 연기금, 각종 기금을 전략적으로 운영하면 충분히 만들 수 있다. 신생아 국부펀드는 단순한 복지가 아니라 국가 운영 원리를 바꾸는 실험이다.”
이 위원장에 따르면, 해당 구상은 정부가 매년 신생아에게 1억원씩 준 돈을 의무적으로 국부펀드 등에 출자한 뒤 20년 후 원금(1억원)을 제외한 수익을 청년이 된 그들에게 지급해 창업 ‘종잣돈’ 등으로 쓰게 하자는 것이다. 2005년 이후 누적 8% 수준인 국내 벤처기업 모태펀드 수익률을 감안할 때 1억원의 20년 후 수익은 3억원 안팎으로 기대된다.
ㅡ국민의 생활 비용을 낮추는 데도 집중하고 있다.
“AI 시대에 플랫폼을 가지면 그 안에 일자리와 수익이 생긴다. 동시에 생활비용도 떨어진다. 플랫폼을 키우는 건 산업 문제만이 아니라 국민의 생활비용 절감과 직결돼 있다. 우리의 강점으로는 교육의 경우 EBS 콘텐츠가 있다. 이걸 AI랑 결합해서 풀면 사교육비가 확 줄어든다. 의료도 마찬가지다. 한국 의료기술은 세계적 수준인데 여기에 AI를 붙여 ‘AI 국민주치의’를 만들고 온라인 병원을 세계적으로 열면 의료 플랫폼 하나로 국민 의료비는 줄이고 세계 의료 시장을 공략할 수 있다. 문화 시장은 전 세계적으로 5000조원 규모다. 삼성전자·LG전자·현대자동차의 디바이스와 네이버·카카오·하이브 등의 콘텐츠에 해외 자본을 결합해 세계적 문화 플랫폼을 만들면 우리가 보유한 8억여대의 스마트 디바이스가 그 플랫폼 통로가 된다.”
ㅡ국립대학 캠퍼스 활용 구상이 흥미롭다.
“전국 국립대학 캠퍼스는 땅이 국가 소유다. 카이스트·충남대만 해도 100만평 부지를 갖고 있다. 미국 스탠퍼드대학은 기업이 캠퍼스 안에 들어오면 99년간 땅을 공짜로 준다. 스탠퍼드가 실리콘밸리를 잉태했듯 우리도 대학이라는 플랫폼 위에 기업을 얹어야 한다. 국립대학 캠퍼스 안에 기업을 유치하고 청년 주택·유치원·국제학교를 지으면 왜 안 오려고 하겠나. 기업 임원들의 소득세를 깎아주고 병역특례 등 혜택을 주면 충분히 지방으로 올 것이다. 예를 들어 통영의 지방 사립대를 국가가 매입해 은퇴자들이 예술과 학문을 즐기는 ‘실버대학 도시’로 전환하거나, 토지주택공사(LH)가 있는 경남 진주의 대학은 건축설계로 특화할 수 있다. 공간을 재설계해야 한다. 초등학교만 해도 운동장 중심의 일제식 학교 구조에서 벗어나 고층건물을 지어 지하에는 체육시설, 상층부에는 워크 스페이스와 문화센터를 넣으면 지역 주민과 학부모가 함께 이용하는 ‘콤팩트시티’의 거점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된다.”
―AI 시대에 일자리 불안을 느끼는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절대 굶어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AI는 기존 질서를 깨는 무기가 될 수 있다. 이 무기를 가장 잘 쓰는 사람을 결국 청년들이다. 조금 지나면 AI를 잘 활용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능력 차이가 크게 벌어질 거다. 기존 질서를 답습하면 미래가 없다.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쪽에 뛰어들라고 말하고 싶다.”
이광재 민관 정책협의회 공동위원장은…
●1965년 강원 원주 출생 ●연세대 법대 ●대통령비서실 국정상황실장 ●17·18·21대 국회의원 ●제35대 강원도지사 ●싱크탱크 여시재 원장 ●국회 사무총장 ●중소·벤처·소상공인 민관 정책협의회 공동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