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트럼프’로 불리며 러시아와 밀착해 온 오르반 빅토르(사진) 헝가리 총리가 16년 만에 권좌에서 물러나게 됐다. 그가 이끄는 여당이 총선에서 큰 격차로 패배하면서다. 2년차 신생 정당이자 야당 티서는 전체 의석수의 3분의 2를 넘는 의석을 확보하며 헝가리 정치의 ‘대변혁’을 예고했다.
12일(현지시간) 헝가리 국가선거위원회에 따르면 이날 총선 결과 개표율 97.74% 기준으로 여당 피데스는 전체 199석 중 55석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티서는 138석을 차지해 최종 목표로 제시해 온 ‘133석’을 훌쩍 넘겼다.
이번 선거 결과는 어느 정도 예견됐다는 평가가 제기된다. 오르반 총리는 2010년부터 집권하며 ‘비자유주의 민주주의’라 부르는 체제를 구축해온 인물이다. 국제 극우운동을 지지해왔다. 유럽연합(EU) 내 대표적 ‘친러’ 지도자이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후원도 받는다. 그러나 지난달 23일 시야르토 페테르 헝가리 외무장관이 EU 회의 중간에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에게 전화해 러시아를 위한 대응안을 논의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내외적으로 강한 비판을 받았다. 지난 7일에는 오르반 총리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통화에서 러시아를 ‘사자’로, 헝가리는 사자를 돕는 ‘생쥐’로 묘사하는 녹취록이 공개되기도 했다. 부패 스캔들과 경제난 심화도 오르반 총리의 지지율에 타격이 됐다.
트럼프 대통령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공개 지지하고 J D 밴스 미국 부통령도 헝가리를 찾아 지원사격에 나섰지만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지난달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공습 이후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여론이 악화한 탓이다. 프랑스 극우 국민연합(RN) 등 유럽의 극우·보수 세력이 트럼프 대통령을 공개 비판하며 일제히 ‘선긋기’에 나선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영국 BBC방송은 오르반 총리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몇 주 만에 치러진 2022년 총선에서는 우크라이나에 군대를 보낼 수 있다는 당시 야당 대표의 발언을 무기 삼아 선거를 전쟁과 평화의 구도로 이끌어 승리했지만, 이번 선거에서는 그 전략이 먹히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새 총리에 오를 머저르 대표는 원래 오르반 총리의 측근으로 피데스에 20년 이상 몸담아온 보수성향의 인물로, 헝가리 정가에서는 무명에 가까웠다. 그러다 2024년 피데스당 소속 카탈린 노바크 당시 대통령이 아동보호시설 성 학대 은폐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인물을 사면한 일을 계기로 오르반 총리와 결별해 티서를 창당했다. 티서는 같은 해 유럽의회 선거에서 29.6%를 득표하면서 돌풍을 일으켰고, 결국 정권을 거머쥐었다.
강력한 정책 추진 동력을 확보한 머저르 대표는 오르반 체제 개혁과 총리 임기 두 번 제한 등을 실행할 예정이다.
EU와 헝가리의 관계 개선이 주목된다. EU는 우크라이나 지원과 러시아 제재를 확대하려고 시도했으나 오르반 총리의 거부권 행사로 몇 달째 중단된 상태다. 반면 머저르 대표는 헝가리를 다시 신뢰할 수 있는 EU 회원국이자 나토 동맹으로 만들겠다고 다짐해왔으며 러시아에는 비판적 입장을 견지해왔다. 머저르 대표는 “헝가리는 EU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강력한 동맹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 등 유럽 지도부는 티서의 승리 소식에 일제히 환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