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일호의미술여행] 내버려두고 지켜보자

유화인데 수채화처럼 보인다. 유화 물감을 아주 묽게 희석하고 캔버스 위에 부어서 물감들 스스로 스미고 얼룩지게 해서 만들어진 작품이다. 1950년대 미국에서 유행한 추상표현주의의 대표적 여류화가인 헬렌 프랑켄탈러가 ‘스미기-얼룩지기’ 기법을 고안해 냈다. 계획된 구성과 명확한 형태의 기하학적 추상에 대한 반발로 그림의 자유분방함과 자연스러운 효과를 목표로 했다.

헬렌 프랑켄탈러 ‘산과 바다’(1952)

산은 어디에 있고 어디까지가 바다일까. 그녀가 캐나다 동부 대서양 연안의 섬 노바스코샤 지방을 여행하면서 영감을 얻었고, 자연은 계획대로 모습을 내보이지 않는다는 점에 반해서 물감을 풀어 놓았다. 출렁이는 바다를 보면서 푸른색 바닷물의 오묘한 색채 변화를 보았고, 산을 덮은 초록색 잎들과 단풍이 물들어가는 산의 풍경에 매혹되어서 이런 풍경을 만들었다. 스미기-얼룩지기 방식으로 자연의 오묘한 변화를 담은 색채 추상화를 이뤘다.

이 그림의 다른 특징은 경계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분홍색이 번지며 주홍색과 자연스럽게 겹쳐지고 초록색은 퍼져나가 푸른색을 삼켜버린다. 초록색과 주홍색으로 가득 찬 산의 자태가 푸른빛을 발하는 바다와 하나가 되는 풍경이다. 바탕에 깔린 황토색 얼룩들은 땅 위에 흩어진 흙 자국처럼 배경을 만들고 있다. 어디가 산이고 어디가 바다인지, 어디까지가 주홍색이고 어디까지가 푸른색인지 구분을 없애버린 자연 풍경의 어울림이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색채 얼룩들이 화면 위에서 각자의 숨을 내쉬고 들이쉬면서 대비와 조화와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화면을 통제하고 구획하려는 화가의 의지가 비워질 때 물감들 스스로 스미고 번지고 얼룩지고 퍼져나가면서 각자의 소리를 드러낸 결과이다.

삶의 이치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명확하고 간결한 논리가 삶의 대부분을 채우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세상이 혼란스러울 때는 흘러가게 내버려두고 지켜보자. 이것저것이 번지고 뒤섞이면서 조화를 이루기도 하고 예기치 않았던 만족스러운 결과와 마주할 수도 있지 않을까.

박일호 이화여대 명예교수·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