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봄꽃 피고 지는 계절이면 4·19 묘지 다녀온 ‘그날’ 상기 선배 작가들 민주정신·행동 강조 그 정신 어떻게 살아있나 반문
꼭 한번 봐달라고 아우성치는 4월의 꽃들에게 이름을 한 번씩 불러준다. 낮은 곳에 작게 피는 꽃마리, 현호색, 양지꽃부터, 좀 더 큰 키의 철쭉, 유채, 조팝, 라일락, 겹벚꽃 같은 이름들. 아름답게만 보이는 저 꽃들도 어쩌면 살아나야 한다는 사실이 가장 고통스러운 상태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엘리엇은 이렇게 노래했을까.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추억과 욕정을 뒤섞고/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꽃들은 저마다의 자리에서 제 시간을 다해 피고 진다. 그 짧은 생을 다하는 동안 꽃들의 질문은 매년 되풀이되지만, 우리는 해마다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그것을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작고하신 소설가 남정현 선생님의 전화를 받은 날도 벚꽃이 휘몰아치듯 피던 날이었다. 국립 4·19 민주묘지에 남편과 아이들을 데리고 봄나들이 오라는 말씀이었다. 시를 쓰는 사람이 그런 민주 현장을 자주 다녀가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순하게 꾸짖으셨다. 남정현 선생님은 ‘분지’ 필화 사건의 주인공이다. 1965년 선생의 단편소설 분지로 인해 반공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 자격정지 6개월의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은 문학작품의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논쟁을 불러일으켰는데, 소설 분지가 반미·계급의식을 고취하고 북한 기관지에 전재된 사실이 공소의 근거였다. 선생은 종종 그때의 일을 상기하곤 했다.
천수호 시인
선생님과 약속한 4·19 혁명 기념일에는 봄비가 세차게 내렸다. 묘역은 비에 젖어 있었고 사람들은 우산을 쓴 채 조용히 오갔다. 분향소에서 향을 피우고 묵념을 올렸다. 북한산 자락의 봄꽃이 더러 떨어지기도 했지만, 빗줄기는 쉬지 않았다. 오전 기념식은 이미 끝나 철거가 한창이었고, 정오에는 따로 기념식이 열린다고 했다. 정부가 주관하는 행사와는 다른, 실제로 그날을 살았던 이들이 모이는 자리였다.
그때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엄마의 손을 잡고 물었다. “엄마, 나쁜 사람만 하늘나라 가는 거야?” 묘역 앞에서 아이는 죽음을 이해하려 애쓰고 있었고, 어른은 쉽게 답하지 못했다. 아이의 질문은 단순했지만, 그 단순함이 오히려 더 깊은 곳을 건드렸다. 우리는 너무 많은 말을 알고 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물음 앞에서는 늘 말을 잃는다.
정오가 되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4·19 혁명에 직접 참여했던 이들이 중심이 된 기념식이었다. 비는 더 굵어졌고, 그 속에서 남정현 선생님을 찾았다. 무엇보다도 선생은 혁명 이후의 시간을 온몸으로 통과해 온 증언자였다. 기념식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단체의 방해로 몸싸움이 벌어졌다. 추모의 자리는 순식간에 흔들렸다. 선생은 여태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곳이 과거만을 기리는 장소가 아니라 지금의 갈등이 겹치는 현장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나는 선생님과 함께 김주열의 묘소를 찾았다. 오래 서 있지 못하는 선생은 비를 맞으며 잠시 머물렀고, 우리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한 학생의 죽음이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시간을 떠올리며, 무엇이 끝났고, 무엇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지를 생각했다. 산 아래로 내려오자, 사람들은 흩어졌다가 다시 한 식당에 모였다. 오랜 시간 감옥에서 보낸 이의 이야기가 조용히 들려왔다. 서로 다른 시간을 견딘 사람들이 한자리에 앉아 있는 풍경이 낯설고도 묵직하게 다가왔다. 선생은 4·19의 정신을 말했다. 그 정신이 이어지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길을 찾기 어렵다고 했다.
그즈음 나는 육필 원고 전시회 때문에 원로 작가들과 통화를 했다. 그때 송영 선생님께서도 4·19의 중요한 의의를 강조하셨다. 그런 의미에서 젊은 작가들과 4·19를 소재로 단편소설 모음집을 엮고 싶다고 했다.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그 이듬해에 떠나신 게 너무 안타깝다. 헌법에까지 새겨진 4·19의 정신은 과연 지금 우리 안에서 어떻게 살아 있는가. 송영 선생님이 끝내 이루지 못한 바람 역시 그 물음의 한 형태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