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들 방 빼세요” 14세 여중생이 쏜 ‘활시위’…올림픽 3관왕들 ‘추풍낙엽’

김제덕 최연소 기록 3년 앞당긴 14세 강연서, 한국 스포츠사 새로 썼다
엔트리 4명→3명 ‘바늘구멍’ 선발전… 실력이 곧 계급인 무한경쟁의 힘
리커브 ‘스타들의 몰락’ 속 컴파운드 ‘베테랑 수성’…신구 교차한 예천 사선

과녁엔 자비가 없었고, 화살은 이름값을 묻지 않았다. 세계 양궁사에 전무후무한 ‘올림픽 3관왕’ 타이틀도, 수년간 한국 양궁을 지탱해온 ‘여제’의 권위도 사선에서 과녁까지의 122m 거리 앞에서는 무력했다.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이 열린 17일 예천 진호국제양궁장. 현장을 지배한 건 승자의 환호보다 무서운 ‘신궁(神弓)들의 몰락’과 14세 소녀가 쏘아 올린 세대교체의 신호탄이었다.

(맨 왼쪽부터) 한국 양궁 국가대표 선수로 선발된 이윤지(25·현대모비스), 강연서(14·부천G-스포츠), 강채영(30·현대모비스). 한국양궁협회 제공

이날 확정된 국가대표 엔트리에서 가장 큰 충격은 여자 리커브였다. 2021 도쿄올림픽 3관왕 안산(25·광주은행)은 최종 평가전에서 5위에 머물며 끝내 아시안게임행 티켓을 놓쳤다. 이에 앞서 2024 파리올림픽 3관왕 임시현(23·한국체대)도 선발전에서 조기 탈락하며 자취를 감췄다. ‘어제의 영웅’이라도 오늘 화살이 흔들리면 가차 없이 짐을 싸야 하는 한국 양궁 특유의 잔혹한 공정성 앞에 예외는 없었다. 그 빈자리는 1위 강채영(30·현대모비스)을 비롯해 처음으로 종합대회 무대를 밟는 오예진(23·광주은행)과 이윤지(25·현대모비스)가 꿰찼다.

 

1위로 선발전의 파고를 넘은 ‘맏언니’ 강채영의 표정에는 안도와 책임감이 교차했다. 강채영은 “스무 살 무렵부터 태극마크를 달았지만, 매 순간 ‘연습한 만큼만 보여주자’는 다짐으로 사선에 섰다”면서 “지독한 훈련 끝에 후회 없는 결과를 얻어 후련하다”고 소회를 밝혔다. 안산과 임시현이 빠진 자리를 이끌어야 할 리더로서의 각오도 잊지 않았다. 그는 새로운 파트너가 된 후배들에 대해 “오예진은 짧고 강렬한 타이밍과 넘치는 자신감이, 이윤지는 성실함이 최고의 무기”라고 치켜세우며 “한국 양궁의 미래를 더 기대하게 만드는 선수들”이라고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여자 컴파운드에서는 박예린(20·한국체대), 박정윤(29·창원시청), 강연서(14·부천G-스포츠) 등 젊은 피들이 선발됐다. 세 선수 모두 아시안게임이 처음이다. 이번 선발전의 화룡점정은 컴파운드 사선에서 터져 나온 ‘14세 반란’이었다. 중학생 강연서가 노련한 선배들을 제치고 국가대표 엔트리에 이름을 올리며 한국 스포츠 최연소 국가대표 기록을 갈아치운 것. 종전 기록자인 김제덕보다도 3년이나 빠르다. 이름값에 매몰되지 않고 오직 ‘점수’로만 말하는 한국 양궁의 시스템이, 만 14세 소녀라는 전무후무한 결과물을 사선 위로 끌어 올렸다. 박예린은 “뽑히게 돼서 감사하다. 아시안게임을 열심히 준비해서 못 나간 선수들 몫까지 노력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최연소 선수인 강연서는 “아시안게임까지 나가게 될지 몰랐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3위까지 오르게 돼 기쁘다”고 벅찬 감정을 드러냈다.

 

한국 양궁 국가대표 선수로 선발된 오예진(23·광주은행). 한국양궁협회 제공

‘14세 소녀’의 파격이 사선을 흔드는 와중에도, 남자부 사선은 베테랑들의 견고한 관록이 지탱했다. 특히 남자 컴파운드는 한국 양궁의 ‘살아있는 역사’들이 건재를 과시했다. 대들보 김종호(32)와 최용희(42·이상 현대제철)는 각각 1위와 3위로 선발전을 통과하며, 4회 연속 아시안게임 동반 출전이라는 대기록을 썼다. 여기에 2위 최은규(33·울산남구청)까지 합류하며 완숙미 넘치는 라인업을 완성했다. 1위 김종호는 “순위에 안주하지 않고 다가올 아시안게임 사선에서 최선의 모습을 보이겠다”며 노련한 각오를 다졌다.

 

안정감은 리커브 사선에서 정점에 달했다. 파리 올림픽 ‘금빛 신화’의 주역인 김제덕(예천군청), 김우진(청주시청), 이우석(코오롱)이 나란히 1~3위를 휩쓸며 3회 연속 메이저 국제대회 동행이라는 진기록을 썼다. 여제(女帝)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격랑 속에서도, 남자부 베테랑들은 압도적 기량으로 왕좌를 사수하며 세대교체의 폭풍 속에서 ‘신구 조화’의 균형추 역할을 해냈다. 몰아치는 풍파에도 흔들림 없이 과녁을 꿰뚫은 이들의 화살은 한국 양궁을 지탱하는 또 다른 저력이었다.

 

한국 양궁에 ‘영원한 황제’는 없었다. 오직 ‘오늘의 명궁’만이 존재할 뿐이다. 올림픽 3관왕의 이름값마저 집어삼킨 잔혹한 선발 시스템이,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양궁을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엔진이라는 평가다. 이름표를 떼고 실력 하나로 생존을 신고한 이들이 이제 나고야를 향해 차가운 활시위를 겨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