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모컨을 돌리다 멈춘 채널, 그곳엔 ‘국민의 축제’ 대신 ‘자본의 장벽’이 서 있었다. 수천억원의 베팅으로 월드컵 중계권을 거머쥔 거대 자본은 ‘콘텐츠의 가치’를 말했고, 안방극장의 시청자들은 ‘월드컵도 돈 내고 봐야 하느냐’며 허탈함을 토로했다. 지난 2월, 적막 속에 치러진 동계올림픽은 그 갈등이 낳은 서늘한 예고편이었다.
21일 방송가에 따르면, KBS는 전날 JTBC와 ‘2026 국제축구연맹(FIFA) 북중미 월드컵’ 중계권 협상을 최종 타결했다. 대회 개막을 불과 한 달여 앞두고 극적으로 도출된 합의다. 교착 상태에 빠졌던 중계권 전쟁은 종합편성채널 JTBC와 공영방송 KBS의 전격적인 ‘악수’로 극적인 전환점을 맞았다. 자본이 독점하던 중계석에 공익의 자리가 다시 마련된 순간, ‘보편적 시청권’이라는 대원칙은 벼랑 끝에서 생환했다.
이번 사태의 발단은 JTBC가 거금을 투입해 올림픽과 월드컵 중계권을 단독 확보하며 시작됐다. 실제 지난 2월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당시 JTBC의 독점 중계는 시청자들에게 낯선 소외감을 안겼다. 법적 기준으로는 가시청권 대역을 충족했을지 모르나, 유료 방송을 통하지 않고 지상파 안테나로만 세상을 보는 가구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축제’가 될 위기였다.
이 팽팽한 대치를 무너뜨린 것은 국무회의에서 나온 이재명 대통령의 ‘엄중한 경고’였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2월 직접 “우리 선수들의 투지와 활약에도 사회적 열기가 충분히 고조되지 못해 아쉽다”며 독점 중계의 폐해를 정조준했다. 이러한 대통령의 ‘질타’는 단순한 우려를 넘어 협상 판도를 뒤흔든 결정적 변곡점이 됐다. 초기 300억원 대를 요구하며 완강했던 JTBC가 결국 140억원까지 몸값을 낮춘 배경에는 단독 강행에 따른 비난여론을 피하고 ‘시청권 사각지대 해소’라는 명분을 챙기려는 ‘전략적 후퇴’가 깔려 있다는 분석이다. JTBC 관계자는 “공영방송인 KBS와의 협상이 성사되면서 국민의 시청권 침해 우려는 해소됐다”면서 “다른 지상파와의 협상도 긍정적으로 이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KBS의 결정 과정도 순탄하지 않았다. 수신료 분리 징수로 최악의 재정 위기를 겪고 있는 상황에서 140억원이라는 적자 폭탄을 감수한 것은 생존을 건 승부수다. KBS 관계자는 “상당한 적자가 예상되지만, 공영방송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JTBC의 최종 제안을 수용했다”며 “수신료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남은 과제는 한 달 앞으로 다가온 대회 준비다. KBS는 이영표 해설위원과 방송인 전현무 등 스타급 중계진을 북중미 현지로 파견해 물량 공세에 나선다. 송재혁 KBS 스포츠센터장은 “통상 월드컵 준비에 1년이 걸리는 점을 감안하면 시간이 촉박한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KBS의 오랜 스포츠 중계 노하우를 총동원해 시청자들에게 고품질의 방송을 전달하겠다”고 강조했다.
이제 공은 아직 결단을 내리지 못한 MBC와 SBS로 넘어갔다. JTBC가 KBS와 동일한 조건을 최후 통보한 상태인 만큼, 향후 협상에 따라 이번 월드컵은 지상파 3사 전체로 확대 송출될 가능성이 여전히 크다.
결국 2026 북중미 월드컵은 종편과 지상파가 공존하는 ‘복합 중계’라는 새로운 미디어 전형 위에 올라섰다. 이번 KBS와 JTBC의 합의는 변화한 미디어 시장 환경 속에서도 ‘보편적 시청권’이라는 공적 가치가 유효함을 확인시킨 사례로 기록될 전망이다. 시장의 효율성과 공공의 이익이 절충점을 찾아낸 이번 모델이 향후 반복될 스포츠 중계권 협상의 지속 가능한 표준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