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북부 디엔비엔푸 계곡은 오늘날 ‘베트남 독립의 성지(聖地)’로 통한다. 베트남이 아직 프랑스 식민지이던 1954년 3∼5월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군과 공산주의 성향의 베트남독립동맹회(베트민) 군대가 격전을 벌였다.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베트민 군대가 ‘세계 최강’을 자처하던 프랑스군을 격파했다. 장병 7400여명이 죽거나 다치고 1만1000명가량은 포로로 붙잡힌 군사적 대재앙 앞에 프랑스는 자국군 철수와 베트남 독립을 결정한다. 디엔비엔푸는 프랑스 군부와 정가에서 ‘치욕의 장소’로 간주되며 오랫동안 언급 자체가 금기시됐다.
지난 2024년 5월7일은 베트남의 디엔비엔푸 승전 70주년 기념일이었다. 온 나라가 축제 분위기로 들뜬 가운데 아주 ‘특별한 손님’이 베트남 정부의 초청으로 기념식장에 함께했다. 70년 전 패자였던 프랑스 정부 대표단이 주인공이다. 대표단장인 세바스티앙 르코르뉘 국방부 장관(현 총리)은 프랑스·베트남 양국 간 미래지향적 관계 구축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로부터 5개월 뒤인 2024년 10월7일 또럼 베트남 국가주석(현재 공산당 서기장도 겸임)이 파리를 방문해 프랑스 정부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또럼 주석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정상회담 후 두 나라 관계를 ‘포괄적 전략 동반자’(Comprehensive Strategic Partnership)로 끌어올린다고 전격 발표했다.
국제정치에서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는 동맹 바로 아래 단계를 뜻한다. 동맹이 없는 베트남 입장에서 포괄적 전략 동반자는 가장 가까운 외국에 해당한다. 그간 미국 중국 인도 한국 일본 러시아 호주 7개국이 베트남의 포괄적 전략 동반자였는데, 여기에 8번째 국가로 프랑스가 추가된 것이다. 프랑스는 말할 것도 없고 미국 중국 일본 등도 모두 과거 베트남과 전쟁을 하거나 한동안 그 영토를 점령하는 식으로 역사적 악연을 맺은 사이다. 하지만 미래 국가 발전을 위한 오늘의 협력에 최우선 순위를 두는 베트남은 과거사 따위엔 별로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흔히 베트남의 대외 정책을 ‘대나무 외교’(Bamboo Diplomacy)라고 부른다. 어떤 특정국에도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유지하며 오로지 실용만을 추구하는 것이 핵심이다. 대나무가 어느 한쪽으로 구부러지지 않고 하늘을 향해 곧게 자라는 점에 착안한 표현으로 알려져 있다. 취임 후 처음 베트남을 방문한 이재명 대통령이 22일 또럼 공산당 서기장 겸 주석과 정상회담을 한다. 청와대는 한국·베트남 지도자의 만남에 앞서 “최상의 파트너십 구축과 전략적 경제 협력 고도화가 기대된다”며 “에너지와 공급망 안정, 핵심 광물 협력 등을 강화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정상회담을 계기로 두 나라가 서로에게 명실상부한 포괄적 전략 동반자가 되길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