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2027년 1월1일부터 임기를 시작할 새 유엔 사무총장을 뽑기 위한 외교전이 본격화했다. 대륙별 순번 관행에 따라 이번에는 중남미·카리브 국가 출신 인사들 중에서 유엔 사무총장이 배출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현재까지 미첼 바첼레트(74) 전 칠레 대통령, 아르헨티나 외교관인 라파엘 그로시(65)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 레베카 그린스판(70) 전 코스타리카 부통령, 마키 살(64) 전 세네갈 대통령이 출사표를 던진 가운데 유엔 본부 차원의 ‘인사 검증’이 시작됐다.
바첼레트는 21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 본부에서 열린 청문회에 후보들 가운데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청문회는 유엔 회원국과 시민사회 대표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후보 1인당 3시간씩 이뤄지는 질의응답을 통해 후보의 포부를 듣고 또 그의 자질을 평가하는 자리다.
앞서 칠레 좌파 정부와 브라질, 멕시코 등의 지지에 힘입어 후보 등록을 마친 바첼레트는 칠레 역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을 지내고 유엔여성기구 초대 사무총장을 거쳐 유엔인권최고대표까지 역임한 국제사회의 유력 인사다. 유엔 창설 이후 80년 넘게 지난 만큼 ‘이제는 여성 유엔 사무총장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부쩍 커진 상황이 그에겐 가장 유리한 요소다. 다만 칠레 정권 교체 이후 출현한 우파 정부가 바첼레트에 대한 지지를 전격 철회한 점은 악재가 아닐 수 없다.
앞서 지난 2월 국빈으로 한국을 방문한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은 이재명 대통령에게 한국 정부가 바첼레트 후보를 지지해줄 것을 요청한 바 있다.
이날 청문회에서 바첼레트는 유엔 헌장에 기반한 다자주의, 그리고 국제사회의 분쟁 현장을 유엔 요원들이 지켜야 할 필요성 등을 강조했다. 청문회 종료 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선 “나는 언제나 여성들 편에 설 것”이라며 “사무총장 당선 시 여성 인권에 관한 유엔의 의제들이 충실히 이행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세계가 드디어 여성 유엔 사무총장을 맞이할 준비가 됐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바첼레트 다음으로 청문회에 임한 그로시는 2019년 IAEA 사무총장을 맡으며 국제사회에서 인지도가 크게 올라갔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러시아의 파상 공세로부터 우크라이나 국내 원자력 발전소 등의 안전을 확보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듣는다.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 수호자로서 북한의 핵무기 개발에 강한 우려를 표명해 온 그로시는 한반도 문제와 유엔의 역할에 관한 질문을 받자 “유엔과 한반도가 협력할 기회가 반드시 올 것”이라고 답변했다. 이란의 핵무기 개발 의혹을 명분 삼은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공격에 대해선 “사무총장 당선 시 국가들 간 무력 사용 문제의 해법을 모색하고 실질적인 행동에 나설 것”이라고 단호한 입장을 밝혔다.
다른 2명의 후보 그린스판과 살은 22일 청문회에 출석할 예정이다.
현재로선 4명의 후보들 가운데 그로시가 가장 유력하다는 견해가 정설로 통한다. 유엔 사무총장은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의 추천에 따라 총회가 선출하는 것이 원칙이다. 따라서 안보리 5대 상임이사국(미국·영국·중국·프랑스·러시아) 가운데 어느 한 나라만 반대해도 안보리의 추천 대상에 오를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유엔 사무총장 선출은 회원국 전체가 모인 총회에서 이뤄지나 실은 안보리, 그중에서도 5대 상임이사국이 사실상 결정권을 쥐고 있는 셈이다.
그로시는 6년 넘게 IAEA를 이끌며 미국, 중국, 러시아를 비롯한 안보리 상임이사국 모두와 우호적 관계를 맺어 왔다. 상임이사국들 중 하나인 러시아는 이미 그로시 지지 의사를 굳힌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