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세 임금님의 ‘사모곡’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프랑스 파리 시테 섬의 유서깊은 꽃시장에는 엘리자베스 2세(2022년 별세) 전 영국 여왕의 이름이 붙어 있다. 2014년 6월 당시 88세이던 여왕의 꽃시장 방문을 기념해 파리시청이 특별히 내린 조치다. 사실 이 꽃시장과 여왕의 인연은 엘리자베스 2세가 아직 왕세녀(王世女) 신분이던 1948년 5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건강이 좋지 않은 부왕(父王) 조지 6세를 대신해 파리를 찾은 엘리자베스 왕세녀는 프랑스 시민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당시 22세로 첫 아이를 임신 중이던 왕세녀는 태교 차원에서 시테 섬의 꽃시장을 찾아가 평소 좋아하는 꽃을 샀다. 그때 엘리자베스 2세의 뱃속에 있었던 아들이 바로 지금의 찰스 3세 영국 국왕이다.

 

젊은 시절의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왼쪽)이 어린 아들 찰스(현 찰스 3세 영국 국왕)와 함께한 모습. SNS 캡처

1948년 11월 태어난 찰스 3세는 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와 아버지 필립 공(公)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하지만 그는 1981년 결혼한 부인 다이애나(1997년 별세)를 내팽개치고 첫사랑 커밀라(현 영국 왕비)와 불륜을 저지른 것 때문에 영국인의 비판을 받았다. 솔직히 엘리자베스 2세도 장남에게 엄청난 실망감과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도 아들의 앞날과 영국 군주제의 미래를 위해 꾹 참는 길을 택했다. 2018년 엘리자베스 2세는 당시 찰스 왕세자에게 영연방 수장 자리를 물려줬다. 사생활을 둘러싼 불미스러운 논란에도 차기 영국 국왕은 찰스가 될 것임을 분명히 한 셈이다. 타계하기 직전인 2022년 2월에는 “때가 되면 커밀라가 왕비로서 역할을 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불륜 논란 탓에 제대로 된 왕실 구성원 대접조차 받지 못하던 며느리에게 힘을 실어준 것이다. 찰스 왕세자 부부로선 그 고마움을 평생 잊지 못할 법하다.

 

엘리자베스 2세가 90세를 훌쩍 넘긴 고령에도 건재하며 70년간 옥좌(玉座)를 지키자 호사가들은 ‘기다림에 지친 찰스는 결국 왕세자 신분으로 끝날 것’이란 농담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어머니의 장기 집권은 결과적으로 아들에게 득이 되었다. 찰스 3세가 일찌감치 왕위에 올랐다면 영국은 물론 영연방 회원국들에서도 ‘이럴 바에야 군주제를 폐지하자’는 목소리가 거셌을 수 있다. 엘리자베스 2세 사후인 2022년 9월 73세라는 고령에 국왕이 된 찰스 3세를 바라보는 영국인들의 기억에서 과거의 ‘불륜남’ 이미지는 아마도 상당 부분 희석됐을 것이다.

 

2022년 6월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오른쪽)이 즉위 70주년을 맞아 열린 기념식에서 장남인 찰스 왕세자(현 찰스 3세 영국 국왕)와 함께한 모습. 당시 엘리자베스 2세는 96세, 차기 왕위 계승자인 찰스는 73세였다. 게티이미지

찰스 3세가 21일 모친 엘리자베스 2세 탄생 100주년을 맞아 대국민 TV연설을 했다. 그는 엘리자베스 2세를 “사랑하는 엄마”(darling mama)라고 부르며 “영원히 우리 마음에 남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77세이고 앞으로 몇 년 뒤에는 80대가 될 찰스 3세가 ‘엄마’라는 표현을 쓴 점에 눈길이 쏠린다. 참으로 눈물겨운 사모곡(思母曲)이다. 엘리자베스 2세는 생전에 영국 국민을 향해 “찰스 왕세자가 왕이 되면 여러분이 제게 줬던 것과 똑같은 지지를 그와 그의 부인 커밀라에게 줄 것으로 안다”고 당부했다. 세상 모든 어머니들의 심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