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잡힐 정도로 작지만 전장에선 꼭 필요한 무기, 장병들이 쓸 마지막 수단…. 권총을 가리키는 수많은 수식어 중 하나다.
전장의 중심이 도시로 이동하면서 좁은 공간에서의 근거리 교전 비중도 증가했다. 이때는 소총보다 길이가 짧은 권총이 유용하다.
소총을 쓸 수 없는 군종에선 권총이 유일한 개인화기다.
소총이나 기관총을 지닌 전투원도 탄약 소진 등의 이유로 권총을 사용해야 하는 순간이 발생하기도 한다.
세계 각국 군대가 주기적으로 권총을 교체하는 이유다. 심지어 북한도 새 권총을 만들었다.
반면 한국군은 내구연한을 초과한 권총이 수두룩한 상황이다.
군 당국은 차세대 권총 개발 계획을 추진하고 있지만, 장병 개개인의 전투력 증진처럼 ‘수수한 과제’보단 F-35 스텔스기처럼 과시 효과가 큰 첨단 무기 도입을 우선시했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K5 권총, 노후화 두드러져
현재 한국군이 쓰는 주력 권총은 1988년 전력화된 K5다. 창군 이래 쓰던 미국산 M1911A1 권총을 대체한 국산 총기다.
대우정밀(現 S&T 모티브)이 한국인 특성에 부합하면서 당시 기술적 트렌드를 반영해 개발한 K5는 1990년대부터 한국군에서 지휘관, 장교, 전차병 등을 중심으로 널리 쓰였다.
해외에도 DP-51이란 이름으로 상당량이 민수용으로 팔렸다.
미국 업체 라이언하트 인더스트리라는 곳에선 K5를 개량, LH9이란 이름으로 판매했다.
LH9은 메이저 브랜드는 아니지만 완성도가 매우 높은 권총으로 평가받았으나, 편의성 등에선 아쉬움이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
이처럼 K5는 개발 이후 국내외에서 긍정적 평가를 받았지만, 한국군 내에선 시간이 갈수록 문제점이 두드러졌다. 내구연한(25년)을 초과한 노후 총기 비중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유용원 의원이 각 군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공군 K5 권총 5428정 가운데 4179정이 내구연한을 초과했다. 공군 보유 K5의 77%가 노후 총기인 셈이다.
해병대는 보유량 4000여정 중에서 40%인 1500여정이 내구연한을 초과한 노후 총기로 분류됐다.
육군은 4만8000여정 중 1만1000여정이 내구연한을 초과했다. 육군 보유 K5 중 22%가 노후 총기였다.
해군은 4907정 가운데 427정(8.7%)이 내구연한을 초과해서 각 군 중 가장 낮은 비율을 기록했다.
K5를 대체할 총기 확보가 늦어지면서 군 당국은 육군 정비부대에서 수리부속을 사용, 2021∼2025년까지 58억6600만원을 투입해 각 군에서 쓰던 K5 39만6119정을 정비했다.
하지만 정비만으로는 38년간 사용해온 K5의 노후화를 해결하기는 어렵다. K5를 대체할 신형 총기 도입 필요성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한국군이 내구연한을 넘긴 K5를 사용하는 동안 북한군은 김정일 국방위원장 시절부터 사용했던 백두산 권총을 대체할 신형 권총을 개발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달 제2경제위원회 산하의 군수공장을 현지 지도하면서 딸 주애와 권총 사격을 했다.
김 위원장은 직접 신형 권총의 전투 성능을 파악하고 “진짜로 훌륭한 권총이 개발되었다”며 극찬했다. 신형 권총의 설계는 지난 2월 19일 당중앙군사위의 심의 비준으로 승인됐다.
군 당국은 북한의 신형 권총이 백두산 권총보다 현대화한 것으로 판단, 제원과 전력화 여부 등에 대해 한·미 공조 하에 분석 중이다.
◆차세대 권총 사업, 어떻게 추진될까
K5의 노후화 문제가 심각해지자 군 당국은 차세대 권총 사업 착수를 저울질하고 있다.
군은 사격 시 반동이 적고 명중률이 높은 차세대 권총의 전력화를 검토하고 있다. 올해 후반기에 차세대 권총에 대한 소요검토요청서를 합참에 제출, 내년에 소요결정을 추진할 예정이다.
군이 차세대 권총 소요를 결정하면, 방위사업청은 사업추진기본전략 수립을 비롯한 사업 관련 절차를 진행할 방침이다.
차세대 권총 소요결정과 사업추진 과정에선 탄약 체계, 모듈화 여부, 내구성, 도입 방식 등이 변수가 될 전망이다.
탄약은 현재 사용중인 9㎜를 쓸 가능성이 높다. 기존 탄약 체계를 활용, 비용을 절감하는 효과가 있다.
차세대 권총이 9㎜ 총탄을 계속 사용하면, 사격 시 발생하는 반동은 K5와 같다. 반동을 줄이려는 사업 목표와 맞지 않는다.
하지만 인체공학적 설계 등에 따라서 사수가 느끼는 반동의 느낌은 달라질 수 있다.
최근 선진국 군대나 보안기관 등에서 쓰이는 신형 권총들은 대부분 폴리머(강화 플라스틱) 프레임을 사용한다.
폴리머는 충격을 미세하게 흡수하는 특성이 있다. 권총 사격시 사수는 손에 전해지는 충격이 줄어드는 느낌을 받는다.
반동의 크기보다 사격 후 총구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시간적 간격을 줄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권총을 연사로 쏴야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선 사격 시 총구가 위로 뜨는 것을 최대한 억제하면서, 원위치가 돌아오는 것은 빠르게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
이는 권총 사격을 매년 1∼2회 정도만 실시하는 장교·조종사는 물론 수시로 권총을 쓰는 특수전부대원에게도 중요하다.
인체공학적 설계는 이같은 부분을 충족할 수 있다. 총열과 손목의 각도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하면, 반동이 팔 방향으로 곧바로 전달되어 총구가 위로 솟구치는 것을 줄일 수 있다.
손이 젖어있을 때에도 그립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안정된 사격에 도움이 된다.
모듈화와 내구성 확보도 중요하게 고려될 전망이다.
한국군 내 여군 비중 증가 등으로 장병들의 체형은 더욱 다양해질 가능성이 크다. 장병 개개인의 임무 및 신체적 특징을 모듈화를 통해 충족하는 것은 총기 사용의 효율성과도 직결된 문제다.
차세대 권총의 내구성은 한반도의 작전 환경과 맞물려 중시될 요소로 꼽힌다.
한반도는 여름의 무더위와 높은 습도, 겨울의 혹한, 봄의 황사, 해안과 도서 지역의 바닷물 등의 환경을 갖고 있다. 그 어떤 혹독한 환경에서도 총기가 정상 작동해야 전투력을 보장할 수 있다.
도입 방식도 변수다. 사업추진기본전략 수립 과정에선 도입 방식을 국내 개발 또는 해외 구매 중에서 선택하게 된다.
국내에선 SNT모티브와 다산기공이 권총 개발·생산 능력을 지니고 있다. SNT모티브는 STP9 등의 권총을 만들었고, 다산기공도 자사의 권총 모델이 있다.
해외에서 구매할 경우엔 검증된 제품을 즉시 전력화하는 장점이 있다.
스위스 등 권총을 새로 도입하는 국가들이 신규 개발보다는 기존 제품의 개량형을 구매하는 경향이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시그 사우어 P320 권총을 도입한다면, 미군과의 호환성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외국선 ‘맞춤형 권총’ 트렌드
해외에선 강력한 화력을 지닌 권총보다 운용 효율성이 우수한 총기가 각광받는 모양새다.
시그 사우어 P320을 비롯해 선진국 군대나 치안기관 등이 선택한 총기들은 보조 장비 사용 및 인체공학적 설계가 중시된 형태다.
과거에 널리 쓰였던 M9 베레타, 브라우닝 하이파워 권총은 부가 장비 장착 비중이 크지 않았다.
하지만 권총에도 광학장비 사용이 보편화하면서, 개발 단계서부터 권총에 장비를 추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트렌드가 됐다.
사용자 특성에 맞출 수 있는 설계 방식도 필수다. 군대에는 다양한 신체적 특징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있다. 손 크기도 사람마다 다르다. 이들에게 단일 모델 권총을 지급하면, 그립의 두께 등에 따라 권총 사격 성적이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그립 교체만 이뤄져도 권총 사격의 효율성이 높아진다.
그동안 한국군에서 권총은 중요성이 낮게 인식되어왔다. 소총의 하위 버전으로 보는 시각도 있었고, 대형 첨단무기가 우선시되는 기조도 한몫했다.
하지만 권총은 다른 무기를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한 장병들(조종사, 특수전부대원, 참모 등)을 지켜줄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한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위력을 제대로 발휘할 대응 수단이 있다는 것은 장병의 심리적 안정과 임무 수행 의지에 큰 영향을 미친다.
내구연한을 넘긴 K5를 서둘러 대체하고, 현대전 추세에 부합하는 차세대 권총 도입을 신속하게 진행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