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소비자물가 상승률 3% 안팎의 고물가가 이어졌던 지난 2024년 봄. 공정거래위원회 정문홍 사무관은 설탕 시장을 면밀히 살피던 중 특이한 사실을 발견했다. 전국이 유통되는 설탕 가격이 같은 시기에 비슷한 수준으로 오른 것. 공정위가 지난 2007년 7월 출고량·가격을 담합 혐의로 제당 3사에 500억원대 과징금을 부과했던 터라 더 눈길이 갔다. 추가 조사에 들어가자 A업체 사업보고서에 과거 담합을 실시했던 시장 점유율이 현재 점유율인 것처럼 적혀 있는 등 석연찮은 구석이 드러났다. 정 사무관에게 대규모 담합이 또다시 이뤄졌을 가능성이 있다는 ‘촉’이 온 것도 이때였다.
하지만 조사는 쉽지 않았다. 한 번 경쟁당국에 덜미를 잡혔던 만큼 제당사들은 회의록, 메신저 등 증거자료를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고, 모든 일은 오프라인 만남이나 전화 통화 등 은밀한 수단만 사용됐다. 현장 조사에서도 업체 측은 “그냥 가격 얘기 좀 한 거예요”라고 둘러댔다.
조사가 난관에 봉착한 상황에서 오행록 당시 제조카르텔조사과장(현 기업거래결합심사국장)이 ‘구원투수’로 등장했다. 그는 2007년 담합 사건을 직접 적발했던 실무자였기 때문에 설탕 산업 구조와 담합의 전문가였다. 오 과장은 과거와 비슷한 구조로 담합이 이뤄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 조사 순서 및 접근 방식, 압박 포인트 등 전략을 전면 재설계했다.
조사 과정은 길었지만 정 사무관은 포기하지 않았다. 거의 1년 동안 사건을 붙들면서 마침내 담합의 약한 고리에 있는 제당사 직원을 특정, 집중적으로 조사를 진행했다. 해당 직원은 정 사무관의 논리적인 지적에 차츰 백기를 들었다. 앞뒤가 맞지 않는 변명을 하게 됐고, 다른 회사에서 먼저 자백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느껴 결국 지난해 3월 결정적인 자백을 해 담합 전모가 드러나게 됐다. 결국 제당사들은 자진신고를 했고, 사건은 일사천리로 마무리돼 올해 3월 CJ제일제당, 삼양사, 대한제당에 총 3960억원의 과징금이 부과됐다. 설탕 담합 조사 과정에서 전분당, 밀가루와 같은 다른 원자재 분야 담합 사건의 단서가 드러나기도 했다.
정 사무관은 정년퇴직을 2년여 앞둔 베테랑으로 사건 초기부터 자료 검토, 행위자 진술조사, 심사보고서 작성 및 전원회의 심의 대응까지 사건 전반을 총괄했다. 우병훈 서기관 역시 진술조사 및 심사보고서 작성, 전원회의 심의 대응 등을 정 사무관과 분담해 진행했다. 업체 측이 주장할 수 있는 쟁점들을 철저히 검토해 공정위 심사관 조치 의견이 심의 과정에 제대로 반영될 수 있게 했다.
공정위는 이렇게 확보한 증거가 검찰 수사의 핵심 자료로 활용됐다고 설명했다. 공정위가 자진신고를 이끌어낸 이후 검찰이 지난해 9월 압수수색을 실시하고 기소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공정위는 “담합 사건에서 공정위의 선제적 조사와 자백 확보가 형사 제재로 이어지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밝혔다.
공정위는 식료품 분야에서 은밀하게 지속된 담합을 끈질기게 추적·제재해 가격인하까지 끌어낸 점을 높이 평가해 정 사무관과 우 서기관에게 각각 포상금 1000만원, 500만원을 수여했다. 실제 제당 3사 기준 설탕가격은 올해 1월까지 담합가격 대비 16.5% 낮아졌다. 주병기 공정위원장은 “경쟁질서를 읽는 공정위 조사관의 역량 그리고 사건의 실체를 파헤치려는 집념이 결합된 성과였다”면서 “행정조사권만으로 시작된 사건 조사였지만, 12개월 동안 이어진 조사관의 끈질긴 노력 끝에 거대 카르텔 가담자의 자진신고를 이끌어 낸 것이 이 사건의 실체를 드러낸 결정적 열쇠가 됐다”고 밝혔다.
공정위는 이 밖에 불공정행위 억지력 제고를 위해 제재 강화 방안을 마련한 민지현 사무관, 이선희 서기관, 김장권 사무관, 김민정 사무관에게 650만원을 포상했다. 민 사무관은 기업들이 법 위반시 얻게 되는 부당이득을 넘어서는 과징금이 부과될 수 있게 ‘과징금 제도개선 태스크포스(TF)’를 운영해 법령 및 과징금 고시 개정안을 마련하고 입법·행정절차를 신속히 진행한 공로를 인정 받았다.
아울러 DB, 영원 등 ‘대기업집단 총수의 계열사 누락행위’를 엄중 제재한 음잔디 과장과 황정애 서기관, 김한결·김준희 사무관, 오은성 조사관에게 총 600만원의 포상금이 수여됐다. 공정위는 이와 함께 담합 등 물가를 자극하는 시장교란행위 집중단속 등을 통해 ‘민생물가 안정’에 기여한 장주연 과장, 전용주 서기관, 윤지수 사무관에게 450만원의 포상금을 수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