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발레의 혁명가’ 모리스 베자르(1927~2007)가 남긴 무용단 베자르 발레 로잔(BBL)이 25년 만에 서울 무대에 섰다. 베자르 사후 후예들은 어떻게 위대한 안무가의 유산과 정신을 지켜가고 있는가. BBL은 25일 서울 GS아트센터에서 열린 공연에서 ‘햄릿’과 ‘불새’, 그리고 ‘볼레로’로 그 답을 보여줬다.
◆발레로 태어난 ‘햄릿’
BBL은 최신작으로 이날 공연을 시작했다. 슬로베니아 출신 안무가 발렌티나 투르쿠가 2024년 로잔에서 초연한 한 시간짜리 발레극 ‘햄릿’이다. 복수를 요구하는 부왕 망령에 홀려 파멸하고 마는 덴마크 왕자 이야기를 무용수들은 광기와 열정, 빛과 어둠으로 풀어냈다. 흰 벽을 배경으로 11인의 무용수가 검은 정장과 드레스 차림으로 플라스틱 의자에 나란히 앉아 시작한 무대에선 빈 의자들, 대형 팬에 휘날리는 비닐 터널, 날것의 조명 등이 미장센을 만들며 인물의 내면을 더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막스 리히터의 미니멀한 음악이 잠잠히 흐르다 시가렛 에프터 섹스의 선율이 스며드는 순간 햄릿과 오필리아가 짧은 안식을 만들어내고, 오필리아의 죽음에 거트루드가 내지른 비명 등 음악과 서사가 절묘하게 맞물리는 연출력이 돋보였다.
◆김기민 표 ‘볼레로’
BBL 내한 공연 피날레는 우리나라가 낳은 발레스타 김기민이 장식했다. 어둠 속에서 붉은 원형 탁자 위에 홀로 선 김기민 손이 큰 호를 그리며 움직이는 것으로 베자르가 남긴 걸작 ‘볼레로’가 시작됐다. 1961년 초연 이래 최고의 무용수만이 설 수 있는 원탁에 우리나라 무용수가 올라선 건 처음이다. 15분간 홀로 무대를 이끌어가야 하는 이 작품의 주역 ‘멜로디’가 감당해야 할 압력과 재능은 다른 무대와 차원이 다르다. 1976년 남성으로는 처음으로 이 역을 수행한 조르주 돈은 38명의 군무를 원탁으로 끌어당기는 강렬한 자력(磁力) 같은 카리스마와 특유의 관능미로 기억된다. 최정상급 발레리나로 활약하다 50세 때 원탁에 처음 올라선 마야 플리세츠카야는 테크닉보다 존재감과 극적 호흡으로 멜로디를 장악했다. 또 다른 최정상 발레리나 실비 길렘은 정지와 미세한 파동을 긴 라인으로 크게 보이게 만드는 절제된 강도로 승부했다.
마린스키 발레단 동양인 최초 수석무용수로 활약 중인 김기민 역시 자신만의 카리스마와 에너지로 빚은 ‘볼레로’를 선보였다. BBL에서 조르주 돈의 계보를 잇는 계승자로 평가받아온 현 예술감독 줄리앙 파브로에게서 ‘멜로디’ 역을 전수받은 김기민은 초반에는 원전에 충실했다. 점프와 그랑 바뜨망 등 동작성이 큰 움직임과, 두 발을 모아 골반을 미는 고관절 동작을 일정한 속도로 반복하며 에너지를 차곡차곡 쌓았다.
후반부 라벨의 ‘볼레로’ 특유의 크레셴도가 임계점에 다가서자 김기민은 억눌러온 에너지를 단번에 해방시켰다. 관능을 앞세우지 않고 힘의 폭발로 절정을 만들어내며 자신만의 볼레로를 췄다. 주역을 지켜보던 군무진이 하나둘 일어서고, 붉은 탁자로 밀려들어 김기민을 높이 들어올리며 수십 개의 손이 하늘로 뻗어오르는 순간, 베자르의 제의(祭儀)가 완성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