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호섭의전쟁이야기] 설마리 전투의 전술적 패배와 작전적 승리

영국군의 설마리(임진강) 전투가 올해로 75주년을 맞았다. 1951년 4월 22일 시작된 중공군 5차 공세는 수 주간 준비된 약 100만명 규모의 대공세였다. 제한적인 목표를 지녔던 이전 공세들과는 달리, 이번에는 서울 함락과 유엔군 주력의 포위 섬멸을 통해 전쟁을 단기간에 끝내려 했다.

이 과정에서 영국군 29여단은 미 3사단과 국군 1사단 사이를 잇는 ‘힌지’였다. 이 연결고리가 무너지면 미 1군단 주력의 방어선 유지와 계획된 철수가 위태로워지고, 이는 곧 서울을 다시 내줄 수 있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여단이 방어해야 할 임진강 정면은 매우 넓었고 결국 주요 능선과 보급로를 따라 종심방어를 할 수밖에 없었다.

파주 적성면 영국군 설마리 전투추모공원에서 열린 임진강전투 75주년 추모행사 현장. 글로스터셔 연대 베레모 형상의 기념비와 뒤편의 235고지가 인상적이다. 필자 촬영

4월 22일 밤, 중공군은 임진강 전선 전반에 걸쳐 도하를 감행했다. 대규모 공격에 방어선은 빠르게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여단 주력은 동쪽 11번 도로 축선을 중심으로 방어하다 철수했고, 감악산으로 인해 분리된 서측을 담당하던 글로스터셔 연대 1대대는 고립되고 말았다. 결국 대대는 235고지에서 사흘을 버텼지만, 약 750명 가운데 극히 일부만 탈출했고 나머지는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글로스터셔 대대를 구출할 수 있었는지를 둘러싼 논쟁이 제기된다. 구출부대는 지형과 중공군의 매복에 가로막혀 작전을 중단했다. 일부에서는 약 2km 지점까지 접근했던 점을 들어 성급한 포기였다고 비판하지만, 전선 붕괴 직전 상황에서 추가 전력 투입은 불가능했다는 반론도 제기된다. 24일 밤 대대에 내려진 사수 명령 역시 중공군을 고착시켜 주력 철수를 보장하기 위한, 이른바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라는 선택이 아니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글로스터셔 대대의 사투는 중공군의 진격을 지연시켰고, 그사이 미 1군단은 비교적 질서 있게 철수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유엔군은 전선을 재정비해 서울을 지켜냈다. 대대의 전투는 전술적으로는 패배였지만, 작전적으로는 이와 동시에 벌어진 가평에서의 영연방 27여단의 활약과 함께 중공군 공세를 좌절시킨 일등 공신 역할을 했다.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1951년 7월 영국을 중심으로 캐나다·호주·뉴질랜드 병력이 통합된 영연방 사단이 편성되었다. 영국의 한국전쟁 참전은 2차대전 이후 느슨해지던 영연방 결속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약화되던 영국의 국제적 영향력 역시 일정 부분 유지되는 데 기여했다.

오늘날 설마리 전투는 영국군을 상징하는 대표적 전투로 기억되고 있다. 한국전쟁에서 영국군에게 수여된 네 개의 빅토리아 십자훈장 가운데 두 개가 바로 이 전투에서 나왔다. 글로스터셔 연대에는 1801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전후방의 적을 동시에 맞아 싸운 공로로, 군모의 앞뒤 모두에 배지를 다는 독특한 전통이 있었다. 그리고 150년 뒤 이곳 설마리에서 그 명예를 지켜냈다.

심호섭 육군사관학교 교수·군사사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