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제천 할머니 및 우리 할머니와 안음 숙모가 근시재에서 놀다가 돌아가는 길에 우리 집에 들르셨다. 가지고 오신 술과 안주를 내게 보내 주셨다.”(『매원일기』1607년 4월 2일)
17세기 선비 매원(梅園) 김광계(1580~1646년)는 도산서원 인근 오천마을에서 평생을 살았다. 김광계는 자연 변화 속에 선현의 가르침이 깃들었다는 사실을 일상에서 익히며 이를『매원일기』로 남겼다.
김광계에게 나들이는 오락에 그치지 않았다. 그에게 나들이는 선현의 가르침을 일상에서 배우고 실천하는 ‘공부’였다. 그는 익숙한 풍경에서 스승의 가르침을 떠올렸으며, 한가로운 나들이도 진정한 선비의 모습을 갖춰가는 ‘공부’로 삼았다.
추운 겨울을 보내고 피어난 향긋한 매화는 김광계에게 자못 특별했다. 바로 스승 퇴계 이황 때문이었다. 스승 이황이 사랑하였던 꽃이 매화였다. 그는 매화 동산이라는 의미로 ‘매원’을 호로 삼았다. 매원은 스승이 매화를 가꾸며 깨우치고 가르쳤던 바를 자기 삶으로 실천하겠다는 제자로서 각오를 담은 호다. 그는 매화가 피는 계절이면 친지와 함께 시를 읊었고, 매화 향기와 시 속에서 스승의 가르침을 되뇌었다. 그에게 향긋한 매화 향기 속 ‘나들이’는 스승의 가르침을 떠올리는 ‘일상의 공부’였다.
낙동강 물길을 따라 펼쳐지는 뱃놀이(선유·船遊)는 역시 단순한 놀이가 아니었다. 조선의 선비는 송나라의 문호 소동파가 <적벽부>를 남겼던 음력 7월16일 ‘기망(旣望)’의 밤에 배를 띄웠다. 달빛이 가득 쏟아지는 강물 위 배에서 <적벽부>를 읊는 동안 조선 선비와 소동파는 시공을 초월하여 마주했다. 조선 선비에게 뱃놀이는 수백 년 전 선비를 만나는 예술적 의식이었다.
뜨거운 태양이 가득한 여름이 되면 조선 선비의 발걸음은 정원 연못과 정자를 맴돌았다. 정자 역시 단순한 쉼터가 아니었다. 조선 선비는 정자를 짓고 연못을 파 연꽃을 심었다. 더운 여름날 연꽃을 완상하는 일 역시 수행의 하나였다. 송나라 주렴계는 <애련설(愛蓮說)>에서 “진흙탕에서 나오되 물들지 않는(出淤泥而不染)”고 읊었다. 조선 선비는 연꽃을 보며 세속에 더럽혀지지 않는 군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연못의 연꽃을 감상하는 일은 군자의 이상적 모습을 대면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사대부 집안 여성에게도 나들이는 단순한 오락에 그치지 않았다. 『매원일기』 1607년 4월 초이틀의 기록은 여성들의 나들이 풍경을 구체적으로 전하고 있다. 김광계는 새로 만든 배를 시험 운행하려고 했다. 이때 할머니는 손자 김광계에게 뱃놀이를 준비시켰다. 여성들은 뱃놀이 속에 자손과 소통했고, 그간의 답답함을 씻었다. 또 여성들은 가을날이면 온천 나들이를 했고, 명절이면 친척 집을 방문해 결속을 다졌다. 여성들의 모임과 나들이는 사대부 집안의 결속을 굳게 다지는 중요한 활동이었다.
남녀를 불문하고, 사대부 집안 구성원에게 나들이는 일상을 공동체의 가치를 가꾸는 실천적 행위였다. 이들은 담장 안의 삶과 담장 밖의 나들이를 분리하지 않았다. 김광계의 선조가 짓고 후손들이 정성껏 관리해 온 탁청정과 그 앞 연못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김광계의 <매원일기> 속 나들이 풍경도 그렇다. 17세기 기록은 현재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일상 공간에서 어떤 가치를 찾고 있을까?
우리는 나들이를 왜 할까?
정자 앞 연못에 핀 연꽃을 보며 ‘군자’를 생각하고, 매화를 시로 쓰며 스승의 가르침을 되뇌었던 조선의 나들이 문화는 일상을 예술이자 공부로 가꾸었던 지혜를 잘 보여주고 있다. 옛 기록 속 선조들의 소소한 일상을 따라가다 보면, 지금은 찾기 힘든 일상의 품격과 삶의 격조를 다시금 발견할 수 있다. 조선의 나들이는 단순히 노는 일이 아니라, 어제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일상을 정성스럽게 가꾸는 고결한 행보였다. (한국국학진흥원 전통생활사 총서 59)
김정운 경북대 퇴계연구소 HK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