겹겹이 쌓인 선의 궤적… 성스러운 세계 향한 여정 [신리사의 사랑으로 물든 미술]

물질의 기도
- 지근욱 개인전 ‘금속의 날개’

스테인리스 스틸 안료 칠한 바탕에
반복 선긋기로 우주의 리듬 시각화
‘갇혀있던’ 광물의 생명력 일깨워
원형·사각형·호 형태로 나뉜 작품
거대한 질서 속 물질·정신 공존 그려

현대 과학의 위대한 발견 중 하나는 관찰이라는 행위가 대상의 상태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객관과 주관을 나누던 근대적 이분법은 무너졌고, 주체의 감각과 세계가 촘촘히 얽혀 있다는 인식―혹은 고대의 종교와 사상이 견지해 온 통찰─은 현대 물리학의 언어로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 이제 과학은 영성을 터무니없는 비약이 아닌 실재의 한 층위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인간의 정신성이 결여된 과학적 지식은 그 한계를 드러낸 지 오래다.

◆관찰 이후의 세계

 

‘Space Engine-Metallic Field’, 2026, 캔버스에 색연필, 아크릴릭과 UV 인쇄. ⓒ이시우. 작가 제공

시각예술가 지근욱은 반복적인 선 긋기를 통해 무한히 지속되는 우주의 리듬을 시각화해 왔다. 작업 초기부터 사용해 온 주 매체는 자와 색연필이다. 자는 흔히 객관적 지표와 제도를 상징하지만, 지근욱의 작업에서는 유약한 숨결과 떨림이 투사되는 통로로 변모한다. 기계적 정밀함을 띠는 화면은 역설적이게도 부서지기 쉬운 물성과 신체적 리듬을 쌓아 올린 수행의 결과물이다. 곧게 뻗어 나가는 선과 색연필 가루들은 작가의 세계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가 되어, 관찰자(작가)와 세계가 만나 서로를 변화시키는 ‘사건’을 발생시킨다.



학고재에서 열리고 있는 개인전 ‘금속의 날개’(4월8일∼5월9일)는 작가가 지녀온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시도이다. 하나는 ‘선 긋기’라는 지극히 선형적인 과정이 시공간의 구분이 사라진 비선형적 감상을 유도할 수 있는가’이다. 두 번째는 ‘신체적인 행위가 정신적 차원에 도달할 수 있는가’이다. 작가는 이러한 문제의식에 대한 촉발제로 “행위가 영혼을 존속하게 한다”는 신지학적 개념을 제시한다. 19세기 성행한 신지학은 만물의 근원에 신성한 지혜가 깃들어 있다고 믿으며 보이지 않는 세계를 탐구했다. 이러한 신비주의적 사유를 인지 가능한 교육적·예술적 구조로 재구성하려 했던 루돌프 슈타이너를 떠올린다면, 지근욱의 선긋기 또한 물리적 차원을 넘어 인식의 확장으로 이어지는 정신적 과정으로 읽어볼 수 있다.

지난한 노동적 행위는 집중과 반복을 통해 비가시적 세계와 접속하려는 일종의 기도였을지 모른다.

◆무한한 시간의 물질

‘Space Engine - Quarter’, 2025, 캔버스에 색연필, 아크릴릭과 UV 인쇄. ⓒ이시우. 작가 제공

전시 제목의 ‘금속’과 ‘날개’는 각각 질문이 함유하는 두 세계ㅡ물질 세계와 영적 세계ㅡ를 암시한다. 금속은 우주의 기억을 품은 물질이다. 태초에 행성의 고리를 이루던 파편이나 우주의 먼지였던 입자들은 대지 깊숙이 잠들어 광석이 되고, 문명의 불을 만나 빛나는 금속으로 환원된다. 이는 단순한 물질적 변환을 넘어 무한히 이어지는 근원적 운동의 표상이다. 금속은 이처럼 단순히 중력에 속박된 대지의 일부가 아니라, 세계의 질서를 따라 유영하는 근원적 빛의 알갱이다.

작가는 ‘스테인리스 스틸’이라는 이름의 아크릴 물감으로 바탕을 두껍게 올림으로써 지질학적이고 행성적인 시간의 층위를 마련한다. 단단한 금속의 표면 위에 색연필 가루가 켜켜이 축적된다. 신지학자 애니 베전트가 말했듯, 광물 안을 들여다보면 숫자와 기하학적 선들이 생명의 증거로서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낸다. 지근욱은 금속 바탕 위에 정밀한 선을 새겨 넣으며 ‘갇혀 있던‘ 광물의 생명력을 일깨운다. 미세한 알갱이들이 모여 거대한 질서를 이루는 광경은 물질과 정신이 동일한 실재 속에 존재함을 증명하며 ‘물질의 영성화’를 목도케 한다.

◆아득한 곳으로

 

‘Space Engine-Metallic Wings’, 2026, 캔버스에 색연필, 아크릴릭과 UV 인쇄. ⓒ이시우. 작가 제공

‘날개’는 궤적에서 파동으로, 선형에서 비선형으로, 물질에서 비물질의 세계로 이동하는 운동을 은유한다. 사실 지근욱의 관심이 과학에서 정신적 영역으로 이동한 것은 갑작스러운 전향이 아니라 필연적 흐름처럼 느껴진다. 거시 세계를 향한 탐구는 결국 내밀한 자아를 향한 여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연의 질서가 인간의 감각 안에 이미 현존한다는 오래된 통찰, 그리고 관찰자의 개입에 의해 실재가 결정된다는 양자역학적 사실을 상기한다면, 지근욱의 화면은 외부의 질서를 단순히 모방한 것이 아니라 인간 본질에 내재한 주파수를 길어 올린 결과물로 볼 수 있다.

전시장에 놓인 작품들은 완결된 세계를 암시하는 원형과 사각형, 그리고 행성의 고리를 확대한 듯 무한히 뻗어 나가는 호(arc)의 형태로 나뉜다. 이는 전체와 부분, 즉 하나의 근원적 질서가 각기 다른 형상으로 분화된 모습으로, 거시와 미시라는 스케일의 차이를 넘어 하나의 흐름을 공유한다. 화면 위의 무수한 궤적들은 낱개의 선으로 머물지 않고, 서로의 간격을 메우며 하나의 거대한 파동으로 응축된다. 반복의 임계점에서 발생하는 공명은 관찰자의 시지각을 교란하고, 인과율에 묶여 있던 시공간의 질서는 해체된다. 이때, 관객은 시간의 선후가 소멸된 비선형적 우주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화면이 내뿜는 거대한 흐름에 합류하게 된다.

폭 10m에 달하는 ‘Space Engine-Metallic Field’는 하나의 거대한 설치물로 구상되었다. 상하 대칭 구조로 배치된 24점의 작품들은 우주의 맥박과도 같은 풍경을 이룬다. 은빛 테두리를 지닌 개별 작품은 저마다 독립된 세계이면서도, 동시에 세속적인(secular) 것이 성스러운(sacred) 영역으로 치환되는 통로이기도 하다. 겹겹이 쌓인 선들이 만들어낸 진동은 중력에 묶인 몸을 일으켜 세우는 날개가 되고, 화면은 비가시적 세계로 향하는 아득한 경로가 된다.

◆수행(遂行)이 수행(修行)이 될 때

지근욱의 작업에서 영적 세계는 특정한 신비주의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물리적 세계를 지탱하는 근원적 생명 에너지에 관한 것이다. 물질 내부에 잠재된 기하학적 질서 그 자체가 생명의 증거라면, 지근욱은 고도의 집중을 통해 자신의 호흡을 그 거대한 체계에 정렬시킨다. 이 정렬이 완성되는 순간 차가운 금속은 정신적 숭고함으로 도약하며, 인간의 신체적 리듬과 우주의 맥박이 하나로 공명하는 ‘전일적(holistic) 합일’을 이룬다.

과학적 레퍼런스를 ‘정밀한 기도문’으로 삼아 도달한 그의 화면은 이제 물질과 정신의 구분이 무화된 차원으로 나아간다. 무수한 선들이 빚어낸 투명하고 단단한 파동은, 우리가 하나의 리듬 속에 묶여 있음을 일깨우는 날갯짓이 되어 파편화된 존재들을 거대한 생명의 박동 속으로 실어 나른다.

‘금속의 날개’를 우리는 수행(遂行)이 수행(修行)이 된 여정의 기록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생명의 세계에 내재한 침묵하는 질서와의 대화의 증언이자, 만물을 포용하여 끝내 자신이 만물이 되는 눈부신 비행의 시작점이다.

신리사 미술사·학고재 기획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