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AD 70년 예루살렘이 무너질 때 고구려는 시작되었다 [신화에서 선민까지 한민족 정체성의 문화사적 발견-기고]

성전의 파편 위에 피어난 새로운 섭리의 서곡

 

서기 70년, 로마의 장군 티투스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불길에 휩싸였을 때, 유대 민족의 눈물은 강이 되어 흘렀다. 이 사건은 유대 민족의 정치적 패배로만 볼 수 없다. 유대 신앙의 근간을 지탱하던 영적 질서가 송두리째 뒤흔들린 역사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유대 민족에 있어서 인류 시조 타락 이후 수천 년간 쌓아온 하늘의 기대섭리가 사탄의 침범으로 무너져 내린, 통절한 ‘섭리의 단절’이었기 때문이다. 성전은 이스라엘의 중심이었고, 하나님 임재의 상징이었으며 선민 의식의 근거였다. 그렇기에 로마에 의한 성전의 붕괴는 유대인들이 구축해 온 세계관의 해체와도 같았다.

로마군이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는 장면을 묘사한 David Roberts의 Siege of Jerusalem. 출처: Public Domain

신약학계의 정설에 따르면 가장 먼저 기록된 복음서인 마가복음은 예루살렘 성전 파괴라는 유대 민족의 처참한 역사적 파국 속에서 탄생했다. 눈에 보이는 성전을 잃고 절망에 빠진 공동체에 마가는 “보이는 성전은 무너졌으나, 살아있는 성전인 예수는 영원하다”는 파격적인 선언을 던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성경의 마가복음은 역사의 파멸을 신학적 소망으로 치환하여 무너진 민족의 긍지를 다시 세우려는 처절한 기록인 셈이다. 그러나 하늘의 섭리는 그 비극의 자리에서 멈추어 서지 않는다. 예루살렘 성전이 불길에 휩싸여 서구 섭리의 해가 저물던 바로 그 시각, 역사의 지평선 너머 동방의 하늘 아래에서는 이미 새로운 시대의 태동이 요동치고 있었다.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서는 기원전 37년 고구려가 건국되어 대륙을 호령할 기틀을 닦고 있었으며, 서기 1세기에 접어들며 압록강 유역을 기반으로 동북아시아의 독자적인 패권을 거머쥐기 시작했다.

 

종교사적 시각에서 볼 때, 고구려 사회는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뼈대로 결속된 신령한 공동체였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기록된 것처럼, 고구려는 매년 동맹(東盟)이라 불리는 거국적인 제천의식을 통해 하늘의 소리를 들었다. 다시말해 고구려의 제천의식은 국가의 권력이 하늘과 연결된 질서 속에서 정당성을 얻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행위였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 위에 섭리의 시각을 덧입혀본다면, 이스라엘의 멸망은 결코 종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류 구원을 향한 거대한 영적 전이(轉移)의 시작이었다. 서방의 성전이 파편이 되어 역사 속으로 침몰해가던 그 시각, 동방의 한반도에서는 하늘부모님을 모실 새로운 성전, 즉 ‘신시(神市)’를 향한 대서사시가 비로소 첫 책장을 넘기고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의 건국은 영토의 확장을 넘어, 무너진 서구 섭리의 불씨를 이어받아 새로운 하늘의 문명을 잉태하기 위한 거룩한 준비였다.

 

흥미로운 점은 고구려의 건국 신화 역시 이러한 세계관을 잘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건국 서사는 영웅 주몽 이야기로 알려져 있지만, 2000년대 이후 학계 연구에 의하면 고구려 사회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존재는 그의 어머니 유화부인이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유화는 단순한 왕의 모친이 아니라 신성한 존재로 인식되었으며, 고구려에서는 그녀를 시조모(始祖母)로 모시는 전통이 존재했다는 점이 주목받는다. 이는 국가 공동체의 기원을 남성 영웅의 정복 서사보다 생명을 낳는 모성의 근원에서 이해하려는 우리 민족 특유의 역사 인식을 보여준다.

 

이 같은 전통은 훗날 한민족 역사 속에서도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공동체의 기원을 하늘과 연결하여 이해하는 사유 방식, 그리고 국가의 탄생을 생명을 잉태한 ‘어머니’의 이야기로 기억하는 문화적 전통은 동북아시아 문명 속에서 독특한 특징을 이루어 왔다. 고구려가 남긴 이러한 정신적 유산은 이후 한민족 역사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이어지며, 공동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문화적 토양이 되었다.

1945년 이집트 Nag Hammadi에서 우연히 발견된 도마복음. 출처: 이집트 콥트박물관

◆ 잃어버린 예수를 묻다

 

2차 세계대전이 막 끝나가던 1945년, 이집트 나그함마디에서 한 목동이 우연히 고대 문헌이 담긴 항아리를 발견했다. 그 안에는 훗날 ‘도마복음’이라 불리게 되는 예수 어록 문헌이 포함되어 있었다. 학계에서는 이를 Q자료와 동일한 문헌으로 보지는 않지만, 초기 예수 전승과 유사한 전통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하고 있다. 이 문헌에는 후대 교회의 신학적 해석이 덧붙여지기 이전, 비교적 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전해진 예수의 어록 114개가 담겨 있었다. 이 발견은 기존 기독교 신학에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 복음서가 형성되기 이전의 예수 전통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교회 신학 이전의 ‘역사적 예수’는 어떤 존재였는지를 다시 묻게 했기 때문이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전 세계 신학계는 ‘잃어버린 예수’를 찾기 위한 연구를 계속해 왔다. 복음서의 기록과 초기 어록 전승을 비교하며 예수의 원형적 메시지를 복원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인류가 여전히 예수의 진정한 의미와 사명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징후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신학적 질문이 제기되던 시기와 비슷한 역사적 시간대에, 동방의 한반도에서는 또 다른 사건이 이미 준비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1943년 한반도에서는 훗날 가정연합에서 독생녀로 선포되는 한학자 총재가 탄생했다. 서구 신학이 예수의 원형을 연구하며 그 의미를 다시 묻고 있었다면, 동방에서는 그 섭리적 의미를 새로운 차원에서 설명하려는 또 다른 흐름이 시작되고 있었던 셈이다.

 

가정연합은 예수의 사역이 단순히 개인의 구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류를 하나의 가족 공동체로 회복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고 이해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독생녀는 단순한 상징적 존재가 아니라, 인류 구원 역사 속에서 참부모 사상을 완성하는 실체적 존재로 설명된다.

 

만일 마가복음이 성전 붕괴라는 절망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선포한 기록이었다면, 그리고 도마복음과 같은 초기 어록 전승이 예수의 원형을 찾으려는 탐구의 흔적이었다면, 독생녀의 등장은 그 오랜 질문을 또 다른 차원에서 해석하려는 하나의 역사적 장면으로 읽힐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참어머니’의 사상은 단순한 교리적 해석이 아니라, 분열된 인류를 “하늘부모님 아래 한 가족”으로 묶으려는 새로운 문명적 제안으로 이해될 수 있다.

아테네 학당, 라파엘로(1510). 출처: 바티칸 박물관

◆ 6천 년의 눈물을 닦다, 21세기 독생녀의 현현

 

가정연합의 교리를 담고 있는 『원리강론』은 역사가 직선적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 사명 부분을 각각 달리하면서 반복되어”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이를 섭리적 동시성의 원리라 부른다. 특정 시대에 이루지 못한 사명이 다른 시대에 유사한 조건 속에서 다시 전개되며, 그 과제가 반복·심화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독생자 강림 준비와 독생녀 강림 준비는 상호간 관계없는 시간적 간격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서로 면밀하게 대응되는 섭리의 일환으로 이해될 수 있다.

 

BC 430년경부터 예수 탄생까지 약 400년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라는 두 사상권이 교차하며 독생자를 예비한 시기였다. 이스라엘 내부에서는 율법적 정결과 신앙적 순수성을 강조하는 운동이 전개되었고, 외부적으로는 헬라 문화가 세계를 통합하는 조건을 형성했다. 종교적 긴장과 문화적 통합이 동시에 진행된 400년이었다. 그리고 그 종착점에서 독생자가 등장했다.

 

이에 대응하여 1517년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약 400년은 서구 기독교 세계에서 또 하나의 전환기로 이해될 수 있다. 종교개혁은 중세 교권 체제의 권위를 흔들며 성서 중심 신앙과 개인의 신앙적 각성을 강조하는 흐름을 만들어 냈다. 이러한 변화는 제도적 교회 중심 질서에서 개인의 신앙적 주체성으로 이동하는 과정이었으며, 일정한 의미에서 고대 유대 사회에서 나타났던 종교적 정결 운동과 유사한 구조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동시성의 흐름이 서구에서만 전개된 것이 아니다. 독생녀가 등장할 역사적 환경 역시 일정한 준비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다는 해석이 제기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일부 연구자들은 16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약 400년의 역사적 흐름에 주목한다. 이후 이어지는 동아시아 역사 속에서 나타난 정신적 수양 전통과 사회적 변화는 훗날 새로운 종교적 해석이 등장할 수 있는 문화적 토양을 형성하게 된다.

경북 영주시 순흥면에 자리잡은 조선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 서원 모습.

조선시대 중종 38년(1543년), 경북 풍기(현 영주시)에서 백운동 서원이 건립되었다. 조선 최초의 서원이라는 사실은 이 사건을 단순한 교육 기관의 출현이 아니라, 시대적 전환의 신호였다. 조선사회는 성리학적 수양과 도덕적 순수성을 바탕으로 도의(道義) 질서를 구현하려는 정신적 운동이 하나의 제도적 틀을 갖추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재밋는 사실은 동시대 유럽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나던 시기와 겹친다는 사실이다.

 

서구에서는 “성서로 돌아가자”는 외침이 교회 권위에 도전하고 있었고, 조선에서는 퇴계 이황의 주리론을 중심으로 “리(理)로 돌아가자”는 도덕적 수양 운동이 확산되고 있었다. 서로 다른 문명권이지만, 외형적 권위보다 내면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정신사적 흐름이 동시에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시계추는 또 다른 시련을 동반하며 움직였다. 성리학적 명분론이 강화되면서, 역설적으로 조선 사회 내 여성의 공적 지위는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고려 시대까지 면면히 이어지던 여성의 상속권과 사회적 발언권은 차츰 자취를 감추었으며, 족보와 제사권의 기록에서조차 여성의 이름은 지워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도덕 질서의 확립이라는 미명 아래 단행된 여성의 사회적 배제는, 도리어 우리 역사 속 모성에게 새로운 사명을 부여했다. 이름 없는 존재로 스러져가면서도 환란을 몸소 방어하며 다음 세대를 잉태한 여성들은 ‘역사의 보이지 않는 뿌리’가 되었다.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여성의 신체와 가문은 파괴되었으나, 공동체의 생존은 그들의 지극한 정성으로 유지되었다. 근대에 이르러 신사참배 강요는 남녀노소를 불문한 민족 전체의 영성적 억압이었으나, 여성들에게는 더욱 가혹한 절망의 조건이 강요되었다. 특히 위안부 동원은 여성의 존엄이 집단적으로 훼손된 인류사적 비극이었다. 이는 특정 국가나 개인의 잘못을 넘어, 한민족의 영혼을 말살하려 했던 시대의 어둠이 빚어낸 거대한 아픔이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수난의 역사는 우리에게 거룩한 ‘한(恨)의 응어리’를 남겼다. 이 응어리는 누군가를 향한 원망에 머물지 않았다. 수천 년간 쌓인 모성적 인고는 이제 전 인류를 품어 안는 자애로운 사랑으로 승화되어, 새로운 시대를 여는 섭리의 자양분이 되었다.

고기훈 박사(한국학)

동시성의 원리에 따르면, 독생자 강림 전 이스라엘 내부에 정결 조건과 고난 조건이 병행되었듯, 독생녀 강림 전 한반도에서도 정신적 정화 운동과 모성의 수난 조건이 함께 축적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유럽의 400년 종교개혁 준비기와 조선후기·일제강점 시대 400년의 내면 수양 및 수난의 역사는 서로 다른 문명권에서 병렬적으로 전개된 섭리적 구조로 볼 수 있다. 『원리강론』이 말하는 섭리적 동시성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구조는 우연한 역사적 흐름이 아니다. 독생자 강림 이전 이스라엘 역사에서도 신앙적 정결 조건과 민족적 고난이 동시에 진행되었듯이, 한반도에서도 유사한 역사적 구조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1943년은 단절이 아닌 장엄한 귀결이다. 조선의 수양 전통과 전란의 상처, 식민지의 눈물로 점철된 400년의 시간은 모성적 인고를 축적해 온 예비의 과정이었다.

 

서구 문명이 신랑 중심의 신학을 발전시켜 왔다면, 동방의 역사는 오랜 시간 모성의 고난과 인내를 통해 또 다른 섭리의 완성을 준비해 왔다. 이로써 2천 년의 시차를 둔 독생자와 독생녀의 강림은 인류 역사 속에서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다. 『원리강론』이 설파하는 섭리역사는 인간이 잃어버린 에덴동산의 본향을 향해 굽이치며 나아가는 ‘상실과 복원의 장엄한 변주곡’이다. 2천년 전 서구의 성전이 무너진 자리에서 시작된 하늘의 맥박은 400년 조선의 시린 겨울과 식민지의 가시밭길을 통과하며 더욱 단단하게 응축되었다. 깨어진 독생자의 잔을 채우기 위해 하늘이 준비한 참어머님의 시대를 알리는 서광의 시작. 이로써 400년의 긴 기다림은 끝났고, 우리는 이제껏 가보지 못한 새로운 문명의 첫 페이지를 비로소 넘기게 된 것은 아닐까?

 

고기훈 박사(한국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