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무용(컨템퍼러리)은 어렵다’가 아직 대세인 한국 사회에서 서울시발레단이 거둔 성과는 각별하다. 첫 공공 컨템퍼러리 발레단으로서 2024년 8월 출범 후 다양한 작품을 아시아·국내 최초로 선보이면서 탄탄한 무대로 빠르게 자리잡았다. 총 43회 공연 중 14회를 매진시켰으며 객석 점유율 평균은 84.8%에 달한다.
여기에 오하드 나하린, 요한 잉거, 샤론 에얄 등 세계적 안무가들이 내한해 직접 무용수를 지도하며 신생 무용단에 값진 세례를 베풀었다. 현대무용을 ‘외계언어’쯤으로 낯설어하고 거리를 좁히지 못하는 컨템퍼러리의 ‘불모지대’에서 거둔 놀라운 성과다.
땀과 열정으로 이 같은 무대를 만들어 온 젊은 무용수 김영민·김여진·남윤승·최목린을 지난달 29일 발레단이 자리잡은 한강 위 노들섬에서 만났다.
◆“성장의 문이 열렸어요.”
오후 연습을 끝내고 인터뷰장에 온 무용수들은 창단 이후 쉴 틈 없이 달려온 지난 시간을 발레단과 자신들이 함께 발전·확장한 소중한 시기로 기억했다. 안무가를 만날 때마다 새로운 문이 열렸고, 한 작품을 끝낼 때마다 춤의 폭이 넓어졌다.
“계속 다른 안무가들이 오고 색깔이 다른 작품들이 계속 오니까, 그때마다 집중해서 배우는 것들이 계속 있어요. ‘내가 이런 쪽에서 성장할 수 있는 문이 계속 열려 있구나’ 싶었어요. 이 안무가가 왔을 때는 이런 춤을 키울 수 있고, 저 안무가가 오면 또 다른 춤을 키울 수 있고요. 안무가나 스테이저(원작 안무 지도자)가 던져주는 말 한마디에 생각도 계속 열려요. 그게 계속 바뀌니까 힘들어도 재미있어요."(김여진)
애초 신생 무용단에 들어오기로 결심한 가장 큰 이유도 좋은 안무가를 만나고 싶다는 갈망이었다. 김영민은 학교를 졸업하고 프리랜서로 활동하다 “공연이 그렇게 재미있지 않았다”며 무용을 그만뒀던 경우다. ‘동작 수행’은 했지만 스스로 좋은 무용수라고 느끼지 못했고, 무대를 마치고도 만족도가 낮았다. 그런데 갓 출범한 서울시발레단에 좋은 안무가들이 잇따라 온다는 소식이 마음을 움직였다. “그분들이 좋은 안무가인 데에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다시 움직여 보고 싶었어요. 무대도 다시 올라가 보고 싶고요.”
남윤승 역시 “안무가를 만날 때마다 배우는 게 많았고,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다음 작품에 또 적용됐다”며 “성장이 쌓이고 쌓여서 우리만의 움직임이 생겨나지 않았나 싶다”고 말했다. 최목린은 “오랜동안 무용을 하면서 ‘주어진 것만 잘 수행해야지’ 했는데, ‘좋아하는 거랑 잘할 수 있는 건 다르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됐다”며 “때로는 ‘이거 나랑 좀 안 맞는데, 하기 싫은데’ 했었는데 이제는 그런 생각이 들기 전에 먼저 몸이 움직인다. 발레단 전체적인 분위기도 그렇게 바뀌고 있다”고 소개했다.
◆눈물의 ‘재키’, 함께 즐겼던 ‘블리스’
2024년 8월 ‘한여름 밤의 꿈’(주재만)을 시작으로 ‘캄머발레’와 ‘5 탱고스’(한스 판 마넨), ‘백조의 잠수’(차진엽), ‘데카당스’(오하드 나하린), ‘워킹 매드’와 ‘블리스’(요한 잉거), ‘노 모어’(유회웅)와 ‘언더 더 트리스 보이스’(허용순), 그리고 ‘재키’(샤론 에얄)에 이르기까지 2년 남짓한 시간 동안 서울시발레단은 10편이 넘는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신생 컨템퍼러리 발레단으로서 벅찬 도전이었지만 현대무용이 가진 매력을 대중에게 새롭게 각인시키는 성과를 거뒀다.
컨템퍼러리가 지닌 매력에 대해 무용수들은 “나를 드러내는 무용”이라고 설명했다. “테크닉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는 무용수가 가진 어떤 색깔, 캐릭터가 더 중점이 되는 것 같아요. 클래식 발레단은 기존에 있는 안무, 클래식적으로 키워야 하는 기술적인 것들이 더 위에 있고요. 무용수들이 컨템퍼러리를 좋아하는 이유는 고전발레보다 나를 더 많이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에요.”(김여진)
남윤승 역시 “클래식 발레는 정답이 있는 무용이라면 컨템퍼러리는 정답을 깨부수는 데서 생겨나는 카타르시스가 있다”고 설명했다.
지나간 공연 중 가장 기억나는 작품을 묻자 지난 3월 공연한 ‘재키’가 지목됐다. 30여분 동안 모든 무용수가 한 명도 무대를 떠나지 않고 계속 춤춰야 하는 작품으로, 엄청난 체력과 집중력이 요구됐다. 김영민은 그 난이도를 “한 손으로는 별을 그리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마름모를 그리는 식으로 아예 다른 걸 동시에 하는 느낌”이라며 “처음 ‘런스루’ 할 때는 힘들었는데, 점점 체력이 올라오고 더 많은 근육을 사용하게 됐다. 달리기할 때 온다는 ‘러너스 하이’가 재키를 출 때 왔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춤을 춘 최목린은 “처음으로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눈물이 날 뻔했다”며 “그런데 끝나고 나니까 희열감이 왔다. ‘다 같이 맞춰야 하는데 넘어지면 어떡하지, 흔들리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컸는데 이겨내니까 오는 도파민과 희열감이 컸다”고 말했다.
남윤승은 “블리스가 지금까지 한 레퍼토리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라며 “무용수들끼리 서로 눈을 마주치면서 굉장히 편안하게, 재즈 같은 음악의 바이브를 타면서 즐기기가 너무 좋았다”고 말했다. 김여진 역시 “무대에서 진짜 즐기는 기분”이었다고 거들었다.
반면 데카당스는 관객에게서 에너지를 받아 되돌려주는 작품이었다. 김여진은 “연습 과정이 제일 힘든데, 관객들이 좋아하는 걸 실시간으로 느낄 수 있으니까 거기서 에너지를 많이 얻고, 그 에너지를 가지고 힘들어도 끝까지 전달하려고 서로서로 한다”고 설명했다.
그동안 만난 거장 안무가들과의 시간에서 배운 것을 묻자 김영민은 ‘재키’로 만난 샤론 에얄을 이야기했다. 키가 크고 팔다리가 긴 그는 늘 움직임을 크게 쓰려고 노력해왔다. 그런 그에게 샤론은 “어떨 때는 작은 움직임이 크게 보일 수 있다”는 조언을 건넸다.
“그 전까지는 어떻게 하면 더 크고 넓게 쓸까만 생각했는데, 그 한마디를 듣고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단순히 크고 넓다기보다, 어떻게 움직임을 수행하는지에 대한 집중도가 더 높아졌습니다.” 김영민은 샤론이 근육을 쥐어짜듯 쓰는 것을 좋아한다고 느꼈다. 전신 근육뿐 아니라 뼈, 내장, 그리고 눈알 하나까지도 어떻게 쓸지 고민했다는 것이다.
장난기 있는 성격을 늘 고민거리로 안고 있던 남윤승은 요한 잉거로부터 가르침을 얻었다. “장난기를 좀 죽여야 프로페셔널하게 춤출 수 있지 않을까 고민이 많을 시기였어요. 그런데 요한 잉거는 그런 진지한 것까지 모두 작품에 녹아들게 하는 능력을 가진 분이더라고요. ‘이렇게 고쳐야지’가 아니라 제 캐릭터를 더 끌고 나갈 수 있는 춤을 연구할 수 있겠구나 싶었어요.”
김여진 역시 무대에 나가기 전 요한 잉거가 건넨 “무대 위에서 추함도 아름다움이다. 무대 위에서 한껏 추해져라”라는 말에 용기를 받았다. “그래서 좀 더 과감하게 무대 위에서 저를 던질 수 있었어요.”
최목린에겐 허용순 안무가의 에너지가 큰 인상을 남겼다. “여성 안무가인데도 남자보다 큰 에너지를 가지고 해주셔서, 리허설 시간 동안 집중도가 확 올라갔다. 무용수들을 어떤 방향으로 이끄는 힘이 있는 분이었고 안무가의 역량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고 말했다. 안무에 대한 욕심을 묻자 “거장 안무가를 많이 만나면서 자기만의 스타일이 확고한 춤을 보여주기 위해선 아직 더 많은 경험을 해야 한다는 걸 느꼈다”며 “지금은 춤을 끝까지 추고 싶고, 그 이후에 안무를 하고 싶다”고 답했다.
◆예술가의 재능과 노력
끊임없이 무대에서 자신의 한계에 도전해야 하는 무용수들에게 재능과 노력은 어떤 의미를 지닐지 궁금했다. “노력도 재능 아닐까요”라고 김여진이 반문했고, 남윤승 역시 둘을 구분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저는 제가 재능이 특출나다고 생각하지는 않거든요. 잘하고 싶고,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서 더 노력하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좋은 무대를 만들어내게 되는 것 같아요. 그냥 진짜 좋아하는 마음, 그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김영민은 더 짧고 단호하게 말했다. “되든 안 되든 그냥 꾸준히 하는 게 제일 좋은 방법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이들을 출범 때부터 지켜본 발레단 관계자는 “노력이 재능을 깨운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며 “오디션으로 처음 봤을 때 정말 아기 같았던 무용수가 한 작품 한 작품 할 때마다 노력을 쌓고, 그 노력이 재능을 점점 깨워가는 걸 옆에서 지켜봤다”고 말했다.
◆“신작은 우리만 할 수 있는 한국적 움직임”
서울시발레단의 다음 무대는 강효형 안무가 신작 ‘인 더 밤부 포레스트(대나무 숲에서)’다. 5월 무대에 오를 이 작품은 서울시발레단만의 새로운 레퍼토리가 된다. 남윤승은 “한국적인 움직임을 보일 수 있을 것 같다. 지금까지 관객이 봤던 작품과 정말 많이 다르고,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움직임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면서 작업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김여진은 “대나무라는 굉장히 동양적인 소재 하나로 그 특성을 살려 안무를 하는 작품”이라며 “감정이나 내용만이 아니라 대나무의 비어 있음, 바람, 성장 같은 속성을 담아 안무를 하는 것이라 기존에 했던 작품들과는 차별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앞으로 또 어떤 안무가들과 작업할지 너무 기대돼요. 우리가 다 스타일이 다르니까, 이 무용수는 이 안무가와 어떻게 작업할까, 어떤 춤을 보여줄까. 색깔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그런 기대감이 있어요.”(김여진)
“5월 신작이 겨울에 시작해서 이제 공연할 때가 되니 봄이 지나고 있어요. 관객분들께서 오셔서 푸르름을 얻어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저희 발레단만의 싱그러움이라고 할까요.”(최목린)
‘인 더 밤부포레스트’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5월 15∼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