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잔인한 시스템을 설계하고, 작동시키고, 정당화해 온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명백한 공범이다”
대한민국 금융 정책의 핵심 브레인으로 불리는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이 현행 금융 시스템을 향해 처절한 자기반성문을 던졌다. 기획재정부 1차관과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내며 평생을 ‘금융 엘리트’로 살아온 그가 스스로를 시스템의 ‘공범’이라 규정하며 금융의 근본적 모순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김 실장은 지난 1일 자신의 SNS에 올린 글을 통해 “왜 가장 여유 있는 사람이 낮은 금리를 누리고, 가장 절박한 사람이 가장 비싼 이자를 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는 이 의문이 단순히 개인의 문제를 넘어 우리가 당연시해 온 금융 질서의 심장을 찌르는 ‘구조적 비극’이라고 진단했다.
◆ “신용점수라는 발명품, 미래 예측 못 하는 과거의 잔상”
김 실장은 금융권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신용평가 제도의 허구를 낱낱이 파헤쳤다. 그는 “신용점수가 상환 능력을 측정한다는 말은 절반만 맞다”며 “등급은 철저히 과거만 본다”고 꼬집었다. 안정적인 궤적을 산 사람은 우대하지만, 거친 풍랑을 견디며 살아온 삶은 가차 없이 깎아내린다는 지적이다.
특히 그는 신용등급을 두고 “금융이 설계한 보이지 않는 계급장”이라는 파격적인 정의를 내렸다.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 개인의 억울함은 고려 대상조차 되지 않으며, 결국 금융시스템이 ‘평균의 정답’을 위해 사람의 가치를 숫자로 압축해 서열화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 “금융위기 겪고도 성찰 없어… 더 높은 성벽만 쌓았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의 행태에 대해서도 날을 세웠다. 김 실장은 “재앙을 만든 건 개별 인간이 아니라 그들의 신용을 재료 삼아 탐욕의 탑을 쌓은 구조였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위기 이후 금융권은 성찰 대신 오히려 더 엄격하고 폐쇄적인 ‘불통의 성’을 쌓았다는 것이 그의 시각이다.
그는 “금융은 구조의 실패를 개인의 책임으로 치환했다”며 “성 안의 사람들은 공고한 보호를 받지만, 변방의 사람들은 안으로 들어올 통로를 찾지 못한 채 겉돌고 있다”고 금융 양극화의 실상을 개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