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땅, 우주를 감싸돌아… 텅 빈 사유에 생명을 불어넣는 빛

방혜자(1937∼2022)

회고전 ‘천지에 마음의 빛 뿌리며 간다’

‘진공묘유’·‘별들의 노래’·‘빛의 탄생…’
빛을 주제로 독자적 예술세계 펼쳐져
270여개 작품·자료 중 절반이 국내 첫선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서 9월까지 진행

“…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테이프에선 ‘일체의 인위적 행위가 있는 법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 같으며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개와도 같다’는 뜻의 ‘공(空)’ 사상을 설파하는 독송이 흘러나왔다.

부엌에서 가족의 저녁을 준비하면서 공사상을 담은 불경 ‘금강경’의 독송 테이프를 틀어놓고 일할 때가 가끔 있었다. 그날도 ‘금강경’ 테이프를 틀어놓고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옆에서 채소를 썰어주던 아들 시몽이 불쑥 말을 꺼내는 게 아닌가.

왼쪽부터 ‘하늘의 땅’(2011, 종이에 천연 안료) 김용출 선임기자.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엄마, 난 저런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아주 텅 빈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상태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고, 무언가 가득 차 있는 그런 빈 상태 같아요. 마치 사막이 텅 빈 것 같이 보이지만 수억의 모래알들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시몽의 말은 ‘세상의 모든 것은 본래 다 비어 있는 공이지만, 단지 공이 아니라 모든 가능성을 다 갖춘 묘유(妙有)’라는 뜻을 가진 ‘진공묘유(眞空妙有)’의 개념쯤 될 것이었다. 두 아이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예술 세계를 풀어갔던 작가 방혜자는, 에세이 ‘마음의 소리’에서 이 같은 대화를 적고 있다. 그의 1982년작 유화 ‘진공묘유’는 바로 아들 시몽이 풀어 이야기한 ‘진공묘유’를 시각화한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한지로 만든 캔버스, 공기 같은 것과 경계를 형성한 듯한 커다란 원, 커다란 바깥 원 안에서 다시 형성된 작은 원들, 텅 빈 같은 가장 가운데의 원, 원은 안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밖으로 뻗어나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면서 ‘빛’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한 방혜자(1937∼2022) 작가의 삶과 예술세계를 재조명하는 대규모 회고전 ‘방혜자-천지에 마음의 빛 뿌리며 간다’가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에서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는 한·불 수교 140주년 기념행사 가운데 하나로 기획됐다. 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장은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충분히 조명되지 못했던 방혜자의 예술세계를 본격적으로 재조명하는 자리”라고 설명했다.

‘진공묘유’(1982, 한지 캔버스에 유화) 김용출 선임기자.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전시에는 초기 추상 실험부터 대표작 ‘진공묘유’를 비롯해 말년의 심화된 빛의 화면까지 작가가 평생 천착해 온 ‘빛’과 ‘우주’의 세계와 의미를 담은 작품 67점과 아카이브 자료 200여점 등이 망라돼 있다. 출품작 중 절반 이상이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

방혜자 작업의 핵심은 무엇보다 ‘빛’이다. 그에게 빛은 단순한 광학적 현상이나 조형적 효과에 머무르지 않고, 생명의 빛에서 마음으로 빛으로, 다시 더 깊고 넓은 우주를 아우르는 차원으로 나아간다.

‘빛의 탄생’(2019, 스테인드글라스, 영은미술관 소장) 김용출 선임기자.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아울러 ‘우주’ 역시 또 다른 핵심 주제였다. 그에게 우주는 무한한 공간 속에서 스며나오는 빛과 생명의 기운을 담은 공간이기 때문이다. 우주와의 일체를 통해 그는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었다.

전시장은 땅의 기운과 하늘의 세계, 마음의 에너지가 깃든 공간을 지나며 그가 평생 사유해온 빛의 세계를 서서히 마주하도록 구성돼 있다. 전시장 입구 ‘인트로’에는 샤르트르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빛의 탄생’ 재현작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샤르트르대성당은 2018년 스테인드글라스 제작 공모를 했는데, 그의 ‘빛의 탄생’(2019)을 최종 선정해 2022년에 설치했다. 전시장에 선보인 작품은 이를 재현한 것이다.

제1부 ‘빛의 탄생’ 섹션에는 경주 토함산과 석굴암 방문 후의 인상을 담은 초기 추상작품 ‘지심(地心)’이 먼저 관람객의 시선을 붙잡는다. 황토색 계열이 두드러지며 작가 특유의 자연과 유사한 색채가 돋보인다. 전시에는 퐁피두센터에 소장된 1960년 작 ‘지심’과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된 1961년 작 ‘지심’을 나란히 대비해 볼 수 있다.

2부 ‘하늘과 땅과 손을 잡고’ 코너에는 자연의 음양, 계절과 오행 등 동양 철학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진공묘유’를 비롯해 우주와 존재, 영적 세계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를 보여주는 작품이 자리한다. 황토와 사선의 구도로 빛의 세계를 그려낸 1996년 작 ‘우주의 노래’는 하늘과 땅을 구분하면서도 상승하는 방향성을 통해 또 다른 나를 찾아가는 마음을 형상화했다.

‘별들의 노래’(1987, 한지 캔버스에 유화, 방혜자재단) 김용출 선임기자.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3부 ‘빛을 심으며’ 섹션에는 대형 부직포에 종이 뒷면에 색을 칠해 앞면으로 배어 나와 은은한 발색과 명암을 만드는 전통 회화의 ‘배채법(背彩法)’을 응용해 더 깊어진 추상적 공간감을 보여준다.

제4부 ‘빛으로 태어나는 길’에는 ‘빛에서 빛으로’를 비롯해 화면 가득 빛의 기운이 퍼져 나가거나 중심에 빛의 효과가 응축되는 구성이 두드러지는 작품들이 선보인다. 원형 캔버스 위에 띠를 이루며 퍼지는 색채를 통해 우주적 질서를 응축한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하늘의 땅’(2011)은 작가의 빛 회화를 압축한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 전시장의 마지막에는 방 작가에 대한 생생한 기록 자료를 모은 ‘아카이브’ 공간으로 구성돼 있다.

1937년 경기 고양에서 태어나고 경기여고 미술반을 거쳐 서울대 미술대학 서양화과를 졸업한 방혜자는, 1961년 첫 프랑스 국비유학생으로 선발돼 파리 국립미술학교에서 수학했다.

팔순을 맞은 2016년 현대화랑에서 개인전 ‘성좌’를 여는 등 그는 프랑스와 한국을 비롯해 독일, 미국, 캐나다, 스웨덴, 벨기에, 스위스, 일본 등 세계 각국에서 80여회의 개인전을 개최하며 국제무대에서 꾸준히 활동했다. 2010년 대한민국 문화훈장, 2012년 한불문화상, ‘세계를 빛낸 여성 문화 예술인상’ 등을 수상했다. 2022년 노환으로 ‘빛의 세계’로 떠났다. 향년 85세.

방초아 학예연구사는 “방혜자는 프랑스나 한국에서 종교 철학, 영성 작업을 하는 작가로만 알려져 있는데, 추상도 구상도 아닌 그의 예술 세계는 미술사에서 지금과 다른 영역으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전시는 9월27일까지. 전시장에 서면 ‘마음의 소리’를 우주와 합일해 시공으로 옮기고 있는 방혜자의 아리랑을 들을 수 있을지도.

“마음을 비우고/ 우주의 중심으로 걸어간다/ 텅 빈 가운데/ 아무도 아무것도 없는/ 안으로 가는 길은/ 마음을 깨어나는 길/ 어둠을 다 거두고/ 밝게 피어나는 시작의 길/ 세포 하나하나까지도/ 활짝 깨어나/ 새로 태어나는 길/ 천지에 마음의 빛/ 뿌리며 간다”(방혜자의 시 ‘빛을 찾아서’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