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저 신용자일수록 고금리 대출을 받는 것을 두고 금융시장이 신용 평가를 ‘보이지 않는 계급장’으로 쓰고 있다는 대통령실 지적이 잇따르면서 신용점수와 대출 문턱을 둘러싼 논쟁이 커지고 있다. 금융권은 정부의 문제의식에 공감을 표하면서도 은행의 건전성 문제 등 위험 관리 차원에서 현행 신용평가 체계를 완화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에 무게를 실었다.
4일 금융권에 따르면 최근 이어진 이재명 대통령(“왜 가장 여유 있는 사람이 낮은 금리를 누리고, 가장 절박한 사람이 가장 비싼 이자를 내야 하느냐”)과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신용등급 숫자가 대출의 성패를 가르고, 금리 높낮이를 정하는 분류가 정말 공정한가”)의 문제 제기와 관련해 업계 전반에서 긴장감이 포착된다.
제도권 금융에서 대출을 받은 고객이 고신용자에 집중돼 있는 건 사실이다. 나이스평가정보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기준으로 전체 대출보유 고객 중 절반가량이 신용점수 900점 이상(48.9%)이었고, 800점 이상 고신용자가 전체의 77.4%를 차지했다. 업계에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취지에는 대체로 동감하지만, 신용점수와 금리 차등을 ‘낙인’으로 일반화하는 건 무리가 있다는 반응이 나온다. 금융권 관계자 A씨는 “금융의 기본 원리는 위험에 상응하는 가격 결정이란 점에서 금리 차별을 단순히 구조적 불공정으로 해석하는 데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며 “신용평가 체계는 차주의 상환능력과 금융질서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인프라”라고 말했다.
업계 관계자 B씨도 “은행은 예금자 보호와 건전성 관리 책임을 동시에 부담하는 만큼 금융 접근성 확대와 리스크 관리가 균형 있게 추진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현재의 저신용자 분류가 비교적 정확하게 실제 위험을 반영한 결과이며, 이를 흔드는 것에 대한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신용평가사 KCB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으로 90일 이상 장기연체가 발생한 비율(불량률)은 신용점수가 낮을수록 급격히 높아졌다. 신용점수 950점 이상 구간에서 0.07%에 그친 불량률이 700점 이상에서는 3.36%, 600점 이상에서는 6.57%로 높아졌다. 300점 이상은 23.1%, 300점 미만 구간에서는 93.72%에 달했다.
금융권은 정책적 요인에 따른 신용도 완화 조치 등이 이미 누적된 상황에서 정부 메시지가 시장의 예측 가능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점도 우려했다. A씨는 “신용평가 기준 자체의 신뢰도를 훼손하는 메시지는 결과적으로 금융 소비자의 책임 있는 신용 형성을 유도하는 인센티브 구조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정부의 문제의식은 현재의 신용평가가 실제 상환능력을 충분히 반영하느냐에 방점이 있는데, 이에 대해 B씨는 “단순 신용점수 중심 평가에서 벗어나 소득 흐름, 거래 이력, 사업성, 성장성 등을 반영하는 평가체계 고도화가 병행될 경우 실질적 금융 접근성 개선이 가능할 것으로 본다”고 동조했다. 금융당국의 신용평가 체계 개편 방향이 나오면 이에 맞춰 금융권도 소상공인·혁신기업 대상 특화 평가모형 등을 도입해 포용 금융 확대 노력을 지속하겠다는 방침이다.
시중은행이 이미 정책자금 집행과 포용 금융 프로그램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금융권 관계자 C씨는 “신용등급이나 대출 시스템에 대한 문제보다는 이를 통해 자금을 공급하는 은행권의 보수적 행보에 대한 지적일 것”이라며 “그동안 은행권은 경제 방파제 역할을 하며 소상공인·취약계층 자금 확대를 지속해왔고, 오히려 저신용자 대상 제도 확대로 금리가 더 낮은 경우도 있다”고 강조했다.
정부가 지적한 ‘금융 양극화’ 문제와 관련해 금융위원회는 태스크포스(TF)를 가동해 신용평가 체계를 비롯한 금융사 역할의 재정립과 중금리 대출 활성화 방안 등을 논의할 것으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