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흡기 달고 임종 직전 구두 유언도 효력”

대법 “질병 기타 급박한 사유”
‘구수증서 부정’ 원심 파기 환송

임종을 앞둔 유언자가 병상에서 예금 계좌번호 등 재산 정보를 스스로 불러줬더라도 말을 받아 적은 유언 증서의 효력을 인정할 수 있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유언자가 폐암 말기로 산소호흡기를 낀 급박한 상태였던 만큼, 녹음 등 민법상 원칙적 형식으로 유언을 남기기 어려운 예외적 상황으로 봐야 한다는 취지다.

4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2부(주심 오경미 대법관)는 최근 유족 A씨가 우리은행을 상대로 낸 예금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중앙지법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 청사의 모습. 이제원 선임기자

A씨는 이부형제인 B씨가 2021년 4월 폐암으로 숨지며 남긴 유언에 따라 B씨의 예금 9600여만원 지급을 구했으나 거부당하자 은행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B씨가 사망 사흘 전 병원에서 A씨와 증인 2명이 입회한 채 “모든 재산을 A씨에게 증여한다”는 유언을 남겼으나 은행 측이 효력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판에선 말로 남긴 유언, 이른바 ‘구수(口授)증서’ 유언의 효력이 쟁점이 됐다.

민법상 유언은 자필증서, 녹음, 공정증서, 비밀증서의 형태가 원칙이다. 다만 ‘질병 기타 급박한 사유’로 인해 4가지 방식을 취할 수 없을 때 구수증서에 의한 유언을 할 수 있다.

1·2심은 구수증서 유언의 효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B씨가 유언을 남기며 예금 계좌번호와 전세보증금을 말하는 모습이 녹화된 게 문제가 됐다. 2심은 “유언 당시 A씨는 자신의 재산 상태와 유증의 의미 등을 충분히 인지하고 말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녹음에 의한 방식으로 유언을 할 수 없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반면 대법원은 B씨가 ‘질병 기타 급박한 사유’로 인해 녹음, 자필증서 등에 의한 유언이 객관적으로 가능하지 않았던 경우였다고 봤다.

대법원은 “유언 당시 B씨는 호흡곤란 증상으로 산소호흡기를 낀 상태에서 자유롭게 계속 말을 하는 것이 곤란했던 것으로 보인다”며 B씨가 주도적으로 육성을 녹음해 유언했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또 B씨가 코로나19에 걸려 격리된 상태에서 유언일로부터 3일 후 사망한 사정 등을 고려하면 다른 방식에 의한 유언이 가능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