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모의 한국인 탈무드] 서희 협상 뒤에 국왕 성종이 있었다

거란과 외교 담판 성공은 인재 육성의 결과
한번 택한 인재는 끝까지 지킨 성종 리더십 탁월

“난세에 영웅 난다”는 말은 절반만 맞다. 평소에 인재를 길러두지 않으면, 큰 위기가 닥쳐도 큰 인물이 나오기 어렵기 때문이다. 993년에 거란군의 침입이 없었다면 “한국사 최고의 협상가” 서희의 이름도 역사에 남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고려가 이미 오래전부터 그런 인물을 키우고 있었다는 점이다.

958년(광종 9), 고려는 과거제를 도입해 신분보다 실력을 기준으로 인재를 선발하기 시작했다. 서희는 그 제도를 통해 관직에 진출했고(960년), 송나라 사행을 통해 외교 감각을 길렀다(972년). 제6대 왕 성종 또한 즉위 초부터 학교 교육과 인재 천거를 적극 장려했고, 자신의 잘못을 직언하는 신하의 간쟁도 기꺼이 받아들였다. 결국 993년의 외교 담판은 하루아침에 어느 한 개인의 배짱과 기지가 아니라, 오랜 인재 육성과 열린 토론 문화의 축적 위에서 나온 성과였다.

박현모 세종국가경영연구원 원장

거란의 수십만 대군이 남하했을 때 특히 눈에 띄는 장면은 고려 조정의 회의 모습이다. 성종은 곧바로 서희를 중군사에 임명해 북방 방어를 맡기고, 자신도 직접 서경(평양)으로 가서 상황을 수습했다. 그리고 이어 “여러 신하를 모아 앞일을 의논하게 했다[會群臣 議之].” 이 평양대토론은 그동안 ‘항복론’과 ‘할지론’이 난무한 무기력한 논쟁으로만 여겨져 왔다. 그러나 세종 때 편찬된 ‘치평요람’을 읽어보면, 오히려 서희의 해법이 치열한 토론과 충돌 속에서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항복’을 주장하는 “어떤 사람의 말”과 ‘할지’를 주장하는 “또 다른 의견”이 맞부딪치는 과정에서 비로소 서희의 계책이 나온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풍경이 고려에서 낯선 장면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현종 때에는 거란과의 외교 문제를 두고 60여명의 신하가 격론을 벌였고, 예종 때에는 여진 정벌과 9성 반환 문제를 놓고 문무 대신들이 공개 토론을 벌였다. 묘청의 난 때에도 김부식의 지구전론과 다수 신료의 속전속결론이 맞섰다. 고려는 또한 간언 잘하는 신하를 높이 평가하는 전통을 지녔다. 서희의 아버지 서필은 거리낌 없는 직언으로 광종의 실정을 막았고, 그 일화는 오랫동안 미담으로 전해졌다.

국왕 성종이 발휘한 리더십 역시 예사롭지 않다. 그는 거란의 침입 소식을 듣자마자 전시체제를 갖추어 북방 방어선을 정비했고, 왕 자신도 직접 북쪽으로 가서 주둔했다. 후대의 현종이나 공민왕처럼 서둘러 남쪽으로 피난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전장과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여러 신하의 의견을 듣는 ‘제3의 길’을 택했다. 온 나라가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서로 다른 의견을 경청하고 다시 토론하게 만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그는 사람을 믿었다. 한때 ‘할지론’을 따라 평양의 곡식을 버리려 했지만, “식량은 곧 백성의 목숨”이라는 서희의 반대를 듣고 즉시 중지시켰다. 또 이지백이 “소손녕에게 금은보화를 보내 속마음을 떠보자”고 제안하자 그 의견도 받아들였다. 급박한 전쟁 속에서도 좋은 아이디어를 가려 채택하고, 적임자에게 일을 맡긴 것이다.

이 리더십은 116년 뒤 예종의 태도와 대조된다. 예종은 1107년, 윤관에게 17만 대군을 맡겨 여진을 정벌하게 하고 동북 9성을 개척했다. 그러나 2년 뒤, 여론이 악화하자 대신들을 모아 9성 반환 문제를 토론하게 했고, 결국 반환론에 밀려 9성을 돌려주었다. 그 결과 윤관은 공을 세우고도 ‘국력을 소모시킨 장수’라는 불명예 속에 물러나야 했다.

지도자는 여론을 무시해서도 안 되지만, 여론에 끌려 국가의 장기 전략까지 흔들려서도 안 된다. 성종은 다양한 의견을 충분히 듣되, 마지막 순간까지 서희를 믿고 밀어주었다. 강동 6주를 되찾은 쾌거는 서희의 세 치 혀에서만 나오지 않았다. 자유롭게 말하게 하고, 좋은 생각을 끝까지 받아들이며, 한 번 선택한 인재를 끝까지 책임지고 지켜준 성종의 리더십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박현모 세종국가경영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