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음악은 어려워요.” 클래식을 즐겨 듣는 지인이 말했다. 굳이 반박하고 싶지 않았다. 평론을 쓰는 나에게도 현대음악은 어색하게 다가올 때가 많으니까. 다만 그 낯섦이 소리 자체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이미 수많은 소리 속에서 산다. 러시아워 도로 위의 소음, 건물 밖 실외기의 낮은 진동, 휴대전화와 각종 기기에서 흘러나오는 전자음, 공사장 너머로 불규칙하게 튀어 오르는 타격음까지. 이런 소리들은 물론 음악 그 자체는 아니다. 대개는 우리의 의식 바깥에서 무심히 흘러가는 일상의 배경이고, 굳이 해석하지 않아도 되는 소리들이다. 그러나 비슷한 질감의 소리가 무대 위에 올라오면 사정은 달라진다. 배경이던 소리가 갑자기 중심이 되고, 관객은 그것을 하나의 ‘작품’으로 들어야 한다. 현대음악 앞에서 느끼는 당혹감은 바로 그 전환에서 생기곤 한다.
서울시립교향악단과 작곡가 정재일(가운데). 세계일보 자료사진
현대음악은 일상의 소리를 그대로 옮겨 놓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변형하고 압축하고 낯선 거리로 되돌려준다. 진은숙의 ‘구갈론’이 어린 시절 서울 거리의 풍물, 잡음, 호객의 소리를 사실적인 풍경화로 그리지 않고 ‘상상의 민속음악’으로 굴절시키는 방식으로 재창조했다. 작곡가는 도시의 소음을 옮겨 적는 사람이 아니라, 그 소리를 자기만의 문법으로 연결하는 사람이다.
현대음악이 이처럼 새롭게 재구성하는 대상은 비단 ‘소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일정한 간격으로 덜컥거리는 지하철, 끊임없이 위아래를 교차하는 에스컬레이터, 사무실 곳곳에서 들리는 키보드 타건 둥 현대인의 하루는 일정한 박자에 묶여 있다. 미니멀리즘이 우리에게 비교적 가까이 들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영화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는 이런 낯선 청취법을 대중에게 먼저 익숙하게 만들었다. 리게티와 펜데레츠키의 음향은 큐브릭의 영화 안에서 우주와 공포의 감각이 되었고, 한스 짐머의 ‘듄’은 모래, 호흡, 금속성의 소리로 낯선 세계를 세웠다. 관객이 그런 소리를 받아들이는 이유는 화면과 서사가 그 소리를 어디에 놓고 들어야 할지 알려주기 때문이다. 낯선 음향은 영상 속에서 불안, 위협, 기억, 광기의 언어가 된다.
정재일의 작업은 이 차이를 잘 보여준다. 그는 ‘오징어 게임’에서 리코더와 멜로디언의 삐걱거림을 잔혹한 놀이의 신호로 바꾸었고, ‘기생충’에서는 바로크풍의 격식으로 계급의 위장과 균열을 드러냈다. 두 경우 모두 화면과 서사가 소리의 의미를 분명하게 붙잡아 주었다. 그러나 서울시향이 그에게 위촉한 ‘지옥’이 콘서트홀 무대에 올랐을 때, 관객 앞에는 이미지가 아니라 음향 자체가 남은 채로 시험대에 올랐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영화음악과 현대음악의 맥락의 차이다. 영화는 소리가 놓일 장면을 제공한다. 반면 콘서트홀에서는 그 장면이 청중의 귀 안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그렇다고 현대음악을 쉽게 만들 필요는 없다. 쉽게 만든다는 말은 때로 낯섦을 덜어내자는 요구가 되고, 그 낯섦이 사라지는 순간 음악이 붙잡고 있던 시대의 감각도 함께 흐려진다.
이 소리가 어떤 순간을 묘사했는지, 어떤 기억을 건드리는지, 왜 어떤 순간에는 선율보다 질감이 더 정확한 표현이 되는지 관객이 짚어볼 수 있어야 한다. 곡의 배치, 프로그램 노트의 언어, 조명의 밀도, 연주 전 짧은 안내도 모두 청취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 즉 낯섦이 제 힘을 잃고 관객에게 닿도록 자리를 마련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오늘날 현대인은 이미 복잡한 소리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귀를 달래줄 더 쉬운 음악이 아니라, 이 낯선 소리들을 기꺼이 올려놓고 바라볼 수 있는 단단한 맥락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