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마의 존재감은 숫자로 정의된다. 경기장 위에서 흐트러지는 갈기와 기수의 움직임은 1위라는 숫자가 뒤따를 때 완성된다. 얼마나 유명한 대회를 제패했는지와 주파기록, 승수는 경주마를 직관적으로 설명해주는 단순하지만 확고한 언어다. 그러나 팬들이 오래 기억하는 것은 숫자만이 아니다. 데뷔전, 기수와의 호흡, 마지막 직선주로에서 보여준 추입, 불리한 조건을 극복한 승부, 은퇴 이후 이어지는 삶이 더해질 때 경주마는 비로소 ‘이야기’로 남는다.
한국 경마에도 이러한 서사를 품은 말들이 적지 않다. ‘닉스고’, ‘글로벌히트’, ‘동반의강자’ 등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야깃거리를 쌓으며 은퇴 이후까지 팬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이에 한국마사회는 경주마를 단순한 기록의 대상이 아니라 감정과 이야기를 담은 콘텐츠로 확장했다. 경주마를 기억하는 팬층을 넘어 대중과의 접점을 넓히기 위해 ‘명마당’ 브랜드와 캐릭터·굿즈 개발, 명예경주마 체험 프로그램 등을 운영하며 말산업의 외연을 확대하고 있다.
◆세계화·유대감·말복지 각기 다른 서사
데뷔 초 인기 최하위권 경주마로 평가받았던 닉스고가 우승을 차지하고, 이후 갑작스레 찾아온 부상과 트라우마로 침체기를 겪은 뒤 세계 경주마 랭킹 1위에 오르기까지의 반전 서사는 지금도 팬들 사이에서 회자된다. 닉스고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은퇴 후 제주에서 씨수말로 제2의 생애를 시작해 세계무대에서 검증된 유전자를 이어가고 있다. 마사회 관계자는 “닉스고는 ‘발굴-성장-세계 시장 검증-국내 우수 유전자 기반 확충’으로 이어지는 국내 경마산업의 선순환 구조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설명했다.
‘글로벌히트’는 기수와 ‘관계의 서사’를 남겼다. 건조 경기에서 최하위권에 가까운 성적을 낸 글로벌히트가 ‘코리안더비’라는 큰 경기에 참가할 때 김혜선 기수는 “우승보다 말의 성장을 위해 출전한다”고 말했다. 김 기수는 인코스를 지키며 선두권을 따라가다 마지막 직선에서 선두를 추월해 우승을 차지했다. 이 우승으로 김 기수는 한국 경마 최초의 여성 기수 더비 우승자가 됐다. 이후에도 102년 한국 경마 역사상 처음으로 국내 그랑프리를 우승한 여성 기수 타이틀을 손에 쥐었다. 세계 최고의 경마경주로 꼽히는 두바이의 ‘알 막툼 클래식’에 참가해 깜짝 3위를 차지할 때도 김 기수와 글로벌히트는 함께했다.
한국 경마 역대 세 번째로 그랑프리 2연패를 달성한 ‘동반의강자’는 데뷔 직후 5경기 동안 3번의 우승을 차지하는 등 빠르게 재능을 알렸다. 은퇴할 때까지 35전 20승을 거둘 정도로 기량이 뛰어났다. 출발이 느렸으나 위치 선정이 좋고 후반 추입 승부를 잘해 두꺼운 팬층을 유지했다. 지난해 ‘명예경주마’로 선정되기도 했다.
원래 동‘방’의 강자로 작명하려 했으나, 오타로 동‘반’의 강자라는 이름을 얻게 된 건 유명한 일화다. 지금은 전북 장수군에 위치한 장수목장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여전히 수백여명의 팬이 당근과 수박을 들고 동반의강자를 보기 위해 목장을 찾는다. 마사회 관계자는 “경주마의 가치를 단순히 현역 시절의 성적이나 흥행성으로만 평가하지 않고, 은퇴 이후의 삶까지 존중하는 방향으로 말복지 정책을 확장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경주마 서사를 콘텐츠로
마사회는 경주마의 이야기를 콘텐츠로 확장해 나가고 있다. ‘명마당’ 브랜드를 통해 닉스고와 글로벌히트, 동반의강자 등을 모티브로 한 인형과 굿즈를 선보인 게 대표적이다. 팬들이 은퇴한 명예경주마를 직접 만나 교감할 수 있는 체험 프로그램과 목장 방문 콘텐츠도 운영했다.
나아가 경주 중심의 산업 구조에서 벗어나 문화·관광·교육·굿즈 산업과 결합한 말산업 생태계를 구축하겠다는 방침이다. 경주마의 생애와 성격을 담은 캐릭터, 말과 사람의 관계를 보여주는 전시, 어린이와 가족 관람객을 위한 인형, 스토리북, 지역 축제와 연계한 체험 콘텐츠 등으로 확장할 예정이다. 이와 함께 국산마 육성 정책을 강화해 한국 혈통과 산업 경쟁력을 높이는 방안을 병행하기로 했다.
마사회 관계자는 “단순한 기념품 제작이 아니라 경주마의 생애와 이야기를 문화 콘텐츠로 연결하려는 시도”라며 “경마장을 단순히 승패를 겨루는 공간이 아니라, 말과 사람의 이야기를 경험하는 공간으로 확장해 나가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