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K컬처와 한글에 주목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한글을 창제하고 문화 민주화를 이끈 세종대왕이 태어난 곳은 수십 년째 골목길 표지석 하나만 남아 있습니다. 매우 부끄러운 일입니다.”
올해 창립 70주년을 맞은 세종대왕기념사업회의 최홍식 회장은 ‘세종대왕 나신 날’(15일)을 앞둔 13일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세종대왕 탄생지 표지석은 서울 종로구 통인동 199-1,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인근 통인시장 도로변에 ‘한줄짜리’ 표지석으로 방치돼 있다”고 한탄했다.
연세대 의대 이비인후과 명예교수이자 현직 전문의인 최 회장은 음성학과 의학의 관점에서 훈민정음을 연구하며, 2015년부터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회장을 맡아 왔다. 그의 조부는 일제강점기 우리말을 지키는 데 헌신한 한글학자이자 민족운동가인 외솔 최현배 선생.
최 회장은 “한글이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상황에서 세종 정신과 한글문화를 세계에 알릴 제대로 된 시설과 예산 지원 체계가 절실하다”며 “세종대왕 탄생지를 단순한 유적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문화 전략을 상징하는 ‘국가상징공간’으로 조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올해는 훈민정음 반포(1446년) 580주년과 한글날 제정(1926년) 100주년이 되는 만큼, 올해를 세종대왕 나신 곳 복원 사업의 원년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최 회장은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세종대왕기념사업법’ 제정을 시급한 과제로 꼽았다. 그는 “1973년에 지어진 현재의 세종대왕기념관은 너무 낡았다. 제대로 보수가 이뤄지지 않아 1970~80년대 건물 모습에 머물러 있다”며 “외국 관광객이 방문하면 민망할 정도”라고 말했다. 운영비 역시 턱없이 부족해 그가 매년 사비를 보태며 “근근이 운영하고 있는” 상태다.
AI 시대에는 한글의 가치가 더욱 커질 것이란 전망도 내놓았다. “AI의 핵심은 사람과 기계의 정확한 소통인데, 영어는 철자와 발음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L과 R처럼 혼동되는 발음도 적지 않지만 한글은 발음과 글자가 일대일로 대응하기 때문에 오류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작아 인공지능 명령어나 언어 기반 시스템에서 한글이 가장 적합한 문자 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는 “훈민정음 해례본에 담긴 발성 원리와 조음기관 묘사는 현대 의학과 음성학으로도 설명 가능하다”며 “이를 과학적으로 연구하고 발전시킨다면 한글은 디지털 시대의 핵심 언어로 더 큰 가능성을 갖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1956년 창립된 세종대왕기념사업회는 세종 시대 문화유산과 한글·과학·국악 관련 자료를 수집·전시하고, 조선왕조실록을 포함한 고전 국역서 716책을 발간하는 등 세종 시대 자료 보존 사업을 이어왔다. 세종대왕 나신 날에는 전국 초·중·고 글짓기대회, 한글 글꼴 공모전 등 다양한 문화 행사도 열고 있다.
최 회장은 과도한 영어 사용에 대한 걱정도 드러냈다. 그는 “거리 간판과 기업명은 물론 행정용어까지 영어가 남발되고 있다”며 “우리말의 위상이 흔들리는 문제인 만큼 국가 차원의 언어 정책과 사회 지도층의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