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 후, 아빠는 노인이 됩니다/심시완/리가서재 /1만5500원
충남 부여 백마강 인근 마을에 사는 83세 공수복 씨는 좀처럼 늙지 않는다. 흰머리도, 노안도 없으며 여전히 스틱 기어 차량을 직접 몬다. 경로당에는 발길조차 하지 않고, 오히려 블루투스 스피커에 더 관심이 많다. 누군가 자신을 노인이라 부르면 “내가 늙었간?”이라며 정색하기 일쑤다.
기자 출신 심시완 작가가 직장 퇴근 후 틈틈이 집필한 이 책은, 독특한 ‘영에이티(Young Eighty)’ 아버지와 50대 딸의 ‘30일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가족 성장 소설이다. 작가는 자신의 아버지를 모델로 삼아 웃음과 눈물, 그리고 르포 같은 현장감이 뒤섞인 작품을 완성했다. 필명 ‘심시완’은 마흔 살에 장편 소설 ‘나목’으로 등단한 한국 문단의 대표적 늦깎이 작가, 박완서처럼 시작하겠다는 포부를 담은 이름이다.
소설의 화자인 딸 ‘나’는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50대 여성이다. 승진 경쟁에서 밀려나고 갱년기와 번아웃에 시달리며, 가슴 속 깊이 묻어두었던 열등감까지 되살아난 상태다. 그런 그녀가 고향으로 내려가 뜻밖의 선언을 한다. “아빠, 이제 노인이 돼주세요.” 이른바 ‘불효막심 30일 프로젝트’의 시작이다. 소설은 단순히 철없는 딸과 고집 센 아버지의 갈등을 그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야기는 아버지의 숨겨진 삶을 하나씩 복원해가는 과정에 가깝다. 낡은 사진 한 장에서 출발한 기억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산업화 시대를 지나며 한 인간이 견뎌온 시간의 무게를 오롯이 드러낸다.
한쪽 다리를 잃은 친할아버지, 백마강에서 사라진 이웃 청년, 가난했던 시장 사람들, 묵묵히 타인을 돌보던 여성들까지.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마치 살아있는 구술사처럼 펼쳐진다. 작가는 충청도 사투리와 지역의 생활 풍경을 능청스러우면서도 따뜻하게 묘사하며 공동체의 기억을 생생하게 살려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늙음’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소설 속 아버지는 단순히 젊어 보이는 노인이 아니다. 그는 아프거나 약해질 권리조차 스스로 허락하지 못한 채 살아온 세대의 상징이다. 가족을 책임져야 했고, 쉬지 않아야 했으며, 감정보다 생존을 먼저 배워야 했던 시대의 남자다. 그래서 딸의 “좀 늙으면 어때요?”라는 말은 단순한 투정이 아니라, 이제는 긴장을 풀고 자신을 놓아주어도 된다는 따뜻한 ‘허락’처럼 들린다.
이 작품은 중년 여성의 성장 서사라는 점에서도 눈길을 끈다. 승진 좌절과 번아웃, 어린 시절의 상처에 짓눌려 있던 딸은 아버지의 삶을 이해해가며 자기 자신을 다시 바라보게 된다. 과거의 상처를 “탁구 하듯 주고받은 것”이라 말하는 아버지의 투박한 위로는 의외로 깊은 울림을 준다.
최근 출판계에서 가족과 치유를 다룬 ‘업마켓 소설’이 주목받고 있지만, 이 작품은 판타지적 위로나 자극적인 설정 대신 현실의 기억과 관계를 정면으로 돌파한다. 그래서 더욱 묵직하다. 부모 세대가 어느새 노년의 한복판에 접어든 중장년 독자라면 깊이 공감할 만하다.
“우리는 과연 부모에 대해 얼마나 알고 살아왔는가. 가장 가까운 존재였지만, 정작 한 인간으로서의 삶은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작가가 던지는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