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옷 입지마” 농담 한마디에…‘살인의 추억’ 30년 누명 [사건 속으로]

‘화성 연쇄살인 사건’ 강압 수사…국가 상대 줄소송
故홍성록 유족, 일부 승소…“수십년 낙인 반영 안돼”

“당신이 범인이야?”

 

“예, 예.”

 

-영화 <살인의 추억> 중

 

영화 ‘살인의 추억’으로 잘 알려진 ‘화성 연쇄살인 사건’은 우리나라 대표 장기 미제사건이었다. 1986년 첫 사건이 발생한 지 30년이 넘게 흐른 2019년에야 범인이 이춘재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시간 동안 용의자로 몰리며 인권을 유린당한 피해자들이 잇따라 발생했다. 고(故) 홍성록씨 역시 그중 한 명이었다. 홍씨 유족은 최근 국가를 상대로 낸 위자료 소송에서 일부 승소했지만, 가족 전체가 평생 낙인 속에서 살아야 했던 것에 비하면 배상액이 턱없이 부족하다며 항소를 예고했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 진범 이춘재의 고교 졸업 앨범 사진(왼쪽)과 부산교도소에 수감 중인 최근 모습. SBS 다큐 ‘괴물의 시간’ 방송화면 캡처

 

17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민사906단독 안동철 부장판사는 지난 15일 홍씨의 두 자녀가 대한민국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피고는 원고에게 각 3857만1428원과 이에 대한 이자를 지급하라”며 일부 승소로 판결했다. 두 사람의 청구액은 총 4억7000여만원이었으나 16% 수준만 인정됐다. 이번 소송은 1987년 화성 연쇄살인 사건 중 세 건(3·5·6차)의 용의자로 지목됐던 홍씨의 자녀들이 “가족 전체가 30년간 ‘연쇄살인범 가족’이라는 낙인 속에서 살아야 했다”며 2023년 제기한 위자료 소송이다.

 

국가 측은 재판에서 유사 사건 판결 4건을 인용하면서 “(홍씨는) 구금 기간이 6~7일에 그쳐 피해가 상대적으로 작다”고 주장했다. 유족이 청구한 위자료는 지나치게 많다는 취지다. 이에 유족 측은 “7일간의 불법 구금만이 아니라 국가가 만든 사회적 낙인으로 인해 30여년간 사회적 구금을 당했다”며 “단순히 구금 기간에 비례해 위자료를 산정해선 안 된다”고 맞섰다. 선고 직후 유족 측 박준영 변호사는 “누구로부터도 사과받지 못한 채 낙인 속에서 산 당사자와 그 가족들의 피해에 대해서 국가가 책임 있는 모습을 보일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런 기대와 상당히 거리가 먼 판결”이라고 지적했다.

지난 15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이춘재 살인누명 국가배상소송 1심 선고가 끝난 후 허위 자백을 강요당했던 고 홍성록씨의 자녀 측 변호인 박준영 변호사가 입장을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 7일간 폭행→허위 자백…석방 후에도 감시

 

유족 측이 법원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홍씨는 1987년 5월10일 화성 연쇄살인 사건 용의자로 지목돼 경찰에 영장도 없이 끌려가 약 7일간 외부와 단절된 채 감금돼 조사받았다. 홍씨는 불법 구금됐던 152시간 중 총 19시간밖에 자지 못했고, 서류철 등으로 폭행당한 끝에 세 사건에 대해 8차례 허위 자백을 했다. 홍씨는 다방 종업원에게 “빨간 옷을 입으면 죽게 되니 입지 말라”는 취지의 농담을 했다는 이유로 연행돼 가혹행위를 당하다 허위 자백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유족 측은 경찰이 정신과 전문의 진단이 없었는데도 홍씨가 ‘변태 성욕을 가진 정신병자’라는 소견이 담긴 허위 수사 보고서를 작성했다고 주장했다.

 

이후 경찰은 언론에 홍씨의 자백을 받았다고 발표했다. 이 과정에서 홍씨의 이름과 얼굴, 직장과 가족 관계 등 신상정보도 모두 공개했다. 당시 경찰은 “가출한 부인이 평소 붉은색 옷을 즐겨 입어 홍씨가 술에 취했을 때 같은 색의 옷을 입은 여인을 보면 이상한 충동을 느껴 범죄를 저질렀다”며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러나 검찰이 홍씨의 자백에 일관성·객관성이 부족하고 직접적인 물적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영장 청구를 반려했고, 피해 현장 흙과 홍씨 구두에서 채취한 흙이 불일치한다는 결과가 나오며 홍씨는 석방됐다.

1987년 5월 고 홍성록씨가 화성 연쇄살인 사건 용의자로 지목돼 수사를 받던 당시 경찰에 자백한 내용을 보도한 신문 기사. 박준영 변호사 제공

 

증거 불충분으로 일주일 만에 풀려났지만 홍씨는 경찰이 항상 자신을 감시한다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유족 측 역시 오랜 기간 가족 전체가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1991년 10월부터 1993년 9월까지 작성된 수사 보고서에는 홍씨의 출퇴근길을 미행한 기록과 여경에게 빨간 옷을 입혀 주변을 배회하게 한 함정 수사 기록, 직장 동료와 이웃 주민들을 통한 동향 파악 내용이 담겼다. 경찰은 자녀들의 학업·취업 현황을 추적하기도 했다. 홍씨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고, 형사들이 찾아올 것이 두려워 취업을 단념했다고 한다. 사회적으로 고립된 채 알코올에 의존하던 홍씨는 간경화와 간암 진단을 받았으나 경제적 기반이 없어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다가 2002년 숨졌다.

 

◆ 30년 만에 드러난 진범 이춘재…공소시효 만료

 

화성 연쇄살인 사건은 장기 미제로 남아 있었지만, 2019년 수감 중이던 이춘재의 DNA가 사건 증거물과 일치한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범인이 드러났다. 이춘재는 1986년 9월부터 1991년 4월까지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일대에서 총 14건의 살인사건과 9건의 강간사건을 저질렀다. 피해자는 모두 여성이었으며 13세부터 71세까지 연령대는 다양했다.

1987년 1월 화성 연쇄살인 사건이 벌어졌을 당시 5차 사건 현장인 경기 화성 황계리 현장을 수색하는 경찰관들. 화성=연합뉴스

 

2019년 9월 이춘재가 범행을 자백하면서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 이형호 유괴 살인 사건과 더불어 대한민국 3대 미제사건으로 꼽히던 화성 연쇄살인 사건이 해결됐다. 수원과 화성, 청주에서 벌어진 살인사건 4건도 이춘재가 저지른 범행으로 추가로 밝혀졌다.

 

그러나 화성 연쇄살인 사건 공소시효가 2006년 모두 만료되면서 이춘재는 해당 사건으로는 처벌받지 않았다. 다만 이춘재는 1994년 1월 충북 청주에서 처제를 성폭행하고 살해한 혐의로 이미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이후 현재까지 부산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하고 있다.

 

◆ ‘불법수사’ 피해자 최소 27명…국가 배상 소송 잇따라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경찰의 강압 수사 논란을 조명한 봉준호 감독 영화 ‘살인의 추억’ 스틸컷.

 

진범이 밝혀지기 전까지 용의자로 몰려 경찰에게 불법 체포와 감금, 폭행 등을 당한 이는 홍씨뿐만이 아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2022년 낸 연쇄살인 사건 수사 피해자 인권침해 진실규명 결정문을 보면 불법 수사 피해자는 최소 27명에 달한다. 1990년 범죄와의 전쟁 선포에도 성과를 못 낸 경찰은 미성년자와 장애인 등을 영장 없이 연행한 뒤 가혹행위를 일삼았다. 형사들은 당시 고교생 강모군에게 “순순히 불라”며 얼굴을 난타했고, 19세였던 박모씨를 별건으로 구속하고 얼굴에 수건을 씌워 짬뽕을 붓기도 했다. 석방된 뒤 트라우마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도 있었다. 당시 30대 차모씨는 이춘재가 저지른 청주 살인 용의자로 추궁당한 뒤 “나는 억울하다” “누가 나를 죽이려 한다”는 고함을 치는 등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다 달리는 열차에 치여 사망했다.

 

앞서 화성 연쇄살인 8차 사건 범인으로 몰려 약 20년간 복역한 윤성여씨는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해 승소했다. 2022년 11월 1심 재판부는 18억6000여만원을 배상하라고 명령했다. 홍씨처럼 화성 연쇄살인 유력 용의자로 지목돼 언론에 실명과 사진 등이 보도됐던 고 윤동일씨의 유족이 제기한 5억여원의 국가 배상 소송은 서울중앙지법에서 1심이 진행 중이다. 윤동일씨 역시 이 사건으로 옥살이를 한 뒤 집행유예 선고로 출소했지만, 경찰의 감시와 주변 눈초리에 정상적인 생활을 이어가지 못했다. 만 26살이던 1997년 암 투병 끝에 사망했다.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 범인으로 몰려 20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한 윤성여씨가 2020년 11월2일 경기 수원시 영통구 수원지방법원에서 열린 재심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수원=뉴시스

 

이춘재는 2020년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 재심 공판기일에 증인으로 출석해 자신을 대신해 누명을 쓰고 억울한 옥살이를 한 윤성여씨에게 사죄의 뜻을 밝혔다. 이춘재는 “제가 저지른 살인사건에 대해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장시간 수용생활 고통을 겪은 윤씨에게 사죄한다”며 “모든 일이 제 자리로 돌아가서 앞으로의 삶에 있어서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을 갖는다”고 말했다. 정신적 충격으로 세상을 등진 사람들의 영상을 본 이춘재는 “그 당시에는 그런 것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관심 갖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자유로운 건 아니고 제가 한 일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라며 “제가 감내할 부분으로 고통 갖고 모든 분들에게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고 했다.

 

홍씨 유족 측은 이번 판결을 계기로 다른 화성 연쇄살인 사건 수사 피해자들도 국가를 상대로 책임을 추궁하고 위로받길 바란다는 입장을 전했다. 진실화해위에서 피해자로 인정된 이들은 2029년 2월까지 국가배상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박 변호사는 “아쉬운 판결이지만 이 판결을 통해 화성 연쇄살인 사건으로 억울하게 수사받은 분들이 권리를 주장할 길이 열려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길 바란다”며 항소 의사를 내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