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 지구촌의 패권국은 단연 영국이었다. 1871년에야 통일을 이룬 독일 제국은 영국이 보기엔 신흥 강국이었다. 세계 곳곳에 광대한 식민지를 거느린 영국과 비교해 독일의 영향력은 유럽 대륙 안으로 한정됐다. 독일 입장에선 영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길은 영국을 능가하는 해군력 건설뿐이었다. 독일의 의도를 눈치챈 영국도 대규모로 해군 군비 증강에 나섰다. 역사가들은 이를 영국과 독일의 ‘건함(建艦) 경쟁’이라고 부른다. 두 나라의 격렬한 대립은 결국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정설로 통한다.
1차대전의 결과 영국의 국력은 쪼그라들고 미국이 잠재적인 최대 강국으로 부상했다. 1930년대 후반이 되면 영국은 국제사회를 이끌 의지는 있으나 능력이 부족한 지경에 처했다. 반면 미국은 마땅히 세계를 지도할 능력이 있으나 의지는 부족한 상태가 지속됐다. 1차대전 패전국인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을 일으켰을 때 이 점이 명확해졌다. 영국은 ‘나치즘으로부터 자유 세계를 지켜야 한다’는 대의(大義)가 확고했지만 현실에선 독일에 연전연패를 거듭했다. 미국은 중립을 선언하고 유럽 대륙의 전황을 지켜보기만 했다. 1941년 12월 나치 독일의 동맹인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당한 뒤에야 비로소 전쟁에 뛰어든 미국은 그때부터 전장을 지배했다. 바야흐로 새로운 패권국 미국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국제정치 이론 가운데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란 것이 있다. 2012년 미국 정치학자 그레이엄 앨리슨 하버드대 교수가 처음 제시한 용어다. 역사적으로 신흥 강국의 부상은 기존 강대국과의 구조적 긴장을 초래하고 결국 전쟁으로 치닫는다는 뜻이다. 2차대전 기간 중 확립된 미국의 패권은 1990년대 초 냉전 종식과 소련(현 러시아) 해체로 더욱 공고해지는 듯했다. 그런데 21세기 들어 미국이 위협을 느낄 만한 신흥 강국이 출현했다. 다름 아닌 중국이었다. 2005년 처음 등장한 주요 2개국(G2)이란 표현 속에는 신흥 강국(중국)의 부상이 기존 강대국(미국)과의 긴장을 불러 일으킨다는 투키디데스 함정이 내포돼 있다.
지난 14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정상회담이 베이징에서 열렸다. 시진핑은 트럼프 면전에서 “대만 문제를 잘못 처리하면 중·미는 충돌할 것”이라며 “두 나라가 투키디데스 함정을 넘어서야 한다”고 말했다. 미·중 양국이 끝내 투키디데스 함정에 빠진다면 가장 심각한 타격을 입을 나라는 다름 아닌 한국이다. 대만해협에서 무력 충돌이 일어나는 경우 그 여파가 한반도에도 미칠 가능성이 아주 크기 때문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인 2025년 5월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대만이 침공을 당하면 돕겠느냐’는 질문에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하려 할 때 생각해보겠다”며 답을 미뤘다. 정부는 최악의 경우를 비롯한 모든 시나리오를 가정하고 안보 전략을 짜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