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과의 전쟁으로 촉발된 대규모 석유 공급 차질이 미국 경제의 계층 간 격차를 더 키우고 있다. 유가 급등으로 소비자들은 비용 부담에 짓눌리는 반면, 에너지 기업과 주주들은 주가 상승과 수익 개선의 혜택을 보고 있다.
미 연방정부의 가격 자료와 수요 통계를 분석한 결과, 미국인들은 이란과의 전쟁 기간 휘발유와 경유에 전년 동기보다 약 450억달러(67조4124억)를 더 지출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16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전했다.
유가 상승은 특히 저소득층과 중산층 가계에 더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소득에서 연료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큰 이들은 고소득층보다 물가 충격에 취약하다. 반면 석유·가스 기업 투자자들은 에너지주 급등으로 자산 가치가 불어나는 효과를 누리고 있다.
올해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500 에너지 부문은 32% 상승했다. 에너지 기업들의 실적 개선은 전반적인 기업 실적 호조를 뒷받침했고, 인공지능(AI) 관련주가 주도한 증시 상승세에도 힘을 보탰다.
그러나 고유가로 인한 에너지 기업들의 호황이 대규모 고용 창출로 이어지지는 않고 있다. 미 노동부는 석유·가스 추출 부문 고용이 1972년 이후 최저 수준에 근접한 것으로 추산했다. 시추 기술 발전으로 노동 수요가 감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전 서비스업체 베이커휴즈에 따르면 미국 내 석유 시추 장비 수는 지난 1년 동안 11% 감소했다.
고유가 충격은 소비 양극화로도 나타나고 있다. 뱅크오브아메리카 연구소에 따르면 중산층과 고소득층의 항공, 숙박, 관광 지출은 전년보다 늘었지만, 저소득층 가구는 지출을 줄이고 있다. 저소득층 고객 비중이 큰 패스트푸드 체인 윙스톱과 전당포 운영업체 이즈코프 등도 최근 실적 발표에서 높은 유가에 따른 소비 둔화를 언급했다.
주유소 이용 행태도 달라졌다. 뉴욕 연방준비은행 연구에 따르면 3월 유가 급등 이후 연소득 12만5000달러(1억8000만원) 미만 가구의 평균 주유량은 감소했다. 반면 고소득 운전자들의 소비는 큰 변화가 없었다.
대선 기간 취임 이후 미국인의 에너지 비용을 절반으로 낮추겠다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최근에는 “유가 상승이 에너지 수출국인 미국에 이익을 가져다준다”고 강조하고 있다. 매사추세츠대 애머스트 캠퍼스의 이사벨라 웨버 경제학 교수는 “문제는 ‘미국’이 누구냐는 것”이라며 “소득 계층별로 보면 고유가의 혜택은 극소수 부유층에 집중되고, 대다수는 거의 혜택을 얻지 못한 채 훨씬 큰 비용을 부담한다”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