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란의시읽는마음] 나란히 걷는 일

김중일

이곳으로 출생할 때

누구나 발을 훔쳐 온다

태어나기 전까지 신던 낡은 제 발을 벗어버리고

새 신발을 훔치듯 ‘옆 사람’이 벗어둔 발을 몰래 신고 나온다

 

그러므로 훔쳐 온 발은 일생 신발 속에 잘 숨기고 다닌다

 

그리고 ‘옆 사람’을 자신도 모르게 찾게 된다

 

훔쳐 온 발로 누군가에게 홀린 듯 걸어가게 될 때가 있다

훔쳐 온 발이 제 의지로 원래 주인에게로 돌아가려 할 때가 있다

 

우연히 그러나 반드시

내 발의 주인을 사랑하게 된다면, 운 좋게 함께 나란히 걷게 된다면?

그때부터 우리의 발들의 진짜 주인은 누구일까

그때부터 우리의 발들은 어디의 누구에게 가는 것일까

(하략)

태어날 때 누구나 발을 훔쳐 온다는 이야기보다, 훔쳐 온 발을 일생 신발 속에 숨기고 다닌다는 이야기보다 놀라운 것은 ‘옆 사람’과 함께 나란히 걷는다는 것. 얼핏 평범해 보이는 이런 이야기야말로 경이로운 것임을 깨닫는다.

 

햇살 아래 백발의 두 사람이 서로의 손을 꼭 붙들고 걷는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본 어제 오후. 나머지 손에는 지팡이와 약국 봉투를 쥐고서 잘름거리며, 발을 맞춰 잘름거리며 걸어가는 모습은 문득 신비로웠다. 저 발들도 언젠가 홀린 듯 서로를 향해 걸어왔던 것일까. 주인을 찾은 것일까. 알 수 없지만, 노년의 두 사람이 나란히 걷는 모습은 그 자체로 근사한 사랑의 은유였다.

 

두 사람을 따라 천천히 걷는 동안 짙어진 새 계절의 냄새를 맡았다. 발들은 이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앞으로 맞닥뜨릴 발의 진짜 주인은 누구일까. 나란히 걷는 두 사람은 어떤 의문도 두려움도 없어 보였다. 다만 걸어갔다.

 

박소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