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다 말랐습니다”…40년 포효 끝에 무대 지운 임재범의 ‘보통의 결단’

기행과 잠적 뒤에 숨겨진 착취의 기억, 대중에게 거대한 위로를 던진 거인이 끝내 도착한 마침표

2026년 5월 17일 서울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의 무대 위에서 대한민국 대중음악사의 거대한 거인이 관객들을 향해 90도로 고개를 숙였다. 거친 허스키 보이스로 대한민국 록과 발라드 역사에 한 획을 그었던 레전드 가수 임재범이 40주년 콘서트 ‘나는 임재범이다’ 서울 앙코르 공연을 끝으로 가요계 은퇴를 공식 선언했다. 올해 1월 전국투어의 시작과 함께 예고했던 결단을 마침내 실행에 옮긴 것이다. 63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는 폭발적인 성량으로 약 3시간 동안 20곡이 넘는 히트곡을 쏟아부은 그는 “더이상은 없다”고 단언했다. 박수칠 때 미련 없이 무대를 내려와 보통의 삶으로 돌아가겠다는 레전드 가수의 마지막 고백은 현장을 가득 채운 팬들의 눈물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40년의 포효를 끝내고 관객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거인의 퇴장. 세계일보 자료사진

임재범의 음악 인생은 1986년 서울고등학교 동창인 신대철이 이끌던 국내 최초의 헤비메탈 밴드 시나위의 1집 보컬로 참여하면서 시작되었다. 데뷔와 동시에 독보적인 가창력으로 대중음악계에 충격을 안긴 그는 이후 외인부대와 아시아나 등 전설적인 록밴드를 거치며 한국 록의 독보적인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솔로로 전향한 이후의 행보는 더욱 극적이었다. 1991년 발매한 솔로 1집 타이틀곡 ‘이 밤이 지나면’은 단 한 번의 방송 출연만으로 가요 차트 상위권을 휩쓸며 6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그러나 이 눈부신 성공은 역설적이게도 그에게 깊은 고뇌를 안겼다. 동료 록커들로부터 록의 자존심을 버리고 팝 발라드로 변절했다는 비아냥을 들어야 했고, 본인 역시 진정으로 원하는 음악적 방향성에 대해 극심한 회의감을 느꼈다. 대성공 직후 그는 포장마차에서 신대철에게 사과를 건넨 뒤 돌연 오대산으로 들어가 1년간 칩거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에도 대중의 기억 속에 임재범은 앨범을 내고 사라지는 증발과 잠적의 아이콘으로 각인되었다. 세간에는 그의 성격이 괴팍하고 기행을 일삼기 때문이라는 루머가 돌았으나, 실상은 가수를 꼭두각시처럼 다루는 당시 연예계의 착취 구조와 소속사와의 부당한 정산 갈등이 얽혀 있었다. 1992년의 한 인터뷰에서 또 증발할 계획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제가 물이 아니므로 더는 증발할 이유가 없고 이제 다 말랐습니다”라는 뼈 있는 농담으로 당시의 심경을 대변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대중음악사의 새로운 서막을 알렸던 시나위 보컬 시절, 록의 전설이 되기 이전 그가 마주했던 뜨거운 열망과 감춰진 상처. 세계일보 자료사진

개인적인 삶의 궤적 역시 상처와 결핍으로 얼룩졌다. 대중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고, 오랜 방황 끝에 가정을 이룬 후에는 아내의 암 투병이라는 비극이 찾아왔다. 2011년 MBC ‘나는 가수다’를 통해 전무후무한 신드롬을 일으키며 재기했으나, 정작 그가 무대 위에서 사투를 벌인 이유는 투병 중인 아내의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한 가장으로서의 절박함 때문이었다. 결국 2017년 아내와 사별한 그는 오랜 공백기를 가지며 홀로 딸을 키워내는 고단한 시간을 지탱해 왔다. 본인의 일상은 끊임없이 무너져 내리는 과정에서 부른 ‘비상’이나 ‘고해’ 그리고 ‘너를 위해’ 등의 곡들이 대한민국 대중에게는 더없는 위로가 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걸어온 길의 가장 큰 역설이다.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 뒤에 감춰진, 동료들이 기억하는 다정하고 따뜻한 이웃 임재범의 얼굴. MBC ‘우리들의 일밤-바람에 실려’

대중에게 비춰진 임재범은 언제나 범접할 수 없는 호랑이이자 거친 카리스마의 소유자였으나, 그와 함께 작업했던 동료들과 지인들의 증언은 전혀 다르다. 손지창과 김도균, 윤도현 등은 그가 누구보다 맑고 순수한 사람이며 속은 양처럼 순하고 다정다감한 인물이라고 입을 모은다. 실제로 사별한 아내 송남영씨와 임재범은 과거 출석하던 교회 인근 임대아파트의 취약계층 주민들과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 오랫동안 연극과 노래를 가르치며 남모르게 봉사활동을 이어온 따뜻한 이웃이기도 했다.

왕관의 무게를 내려놓고, 이제는 딸의 곁에서 평범한 일상을 걷게 된 거장의 마침표. 세계일보 자료사진

마지막 무대를 마친 임재범은 향후 계획에 대해 주변의 그늘진 곳을 돌보며 선행을 이어가고 싶다는 소망을 전했다. 독보적인 전설의 자리를 미련 없이 내려놓은 결정적 이유 역시 대중의 시선 때문에 그간 마음 편히 함께 걸어주지 못했던 딸을 향한 미안함, 즉 평범한 아버지로서의 나날을 회복하기 위함이었다. 왕관의 무게를 견디며 고독하게 포효하던 호랑이는 이제 숨지 않고 당당하게 걷는 일상으로의 퇴장을 선택했다. 박수칠 때 미련 없이 마침표를 찍은 인간 임재범의 결단은 세상의 명예보다 평범한 삶의 가치가 왜 더 소중한지를 보여주며 대중의 가슴 속에 깊은 여운을 남긴다. 거인은 떠나지만 그가 세상에 던진 위로의 문장들은 여전히 대중의 곁에 언제나 남아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