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끼의 기억, 누군가의 하루를 위로하다 [유한나가 만난 셰프들]

‘르뵈프’ 허덕행 셰프

45일 숙성 스테이크·저온조리 문어 풀포
장시간 공들여 완성하는 공통점 외에도
육류는 육향… 해물은 감칠맛 발현될 때
재료 속 숨겨진 빛 찾은 듯한 기쁨 느껴

맛·시간·경험 어우러져 균형감 맞아야
마음 따듯해지는 요리로 손님상에 올려
누군가는 요리를 기술이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예술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르뵈프의 허덕행 셰프를 만나고 나면, 요리는 결국 ‘감정을 전달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단순히 배를 채우는 한 끼를 넘어, 누군가의 하루를 위로하고 기억 속에 오래 남는 경험을 만드는 것. 허 셰프는 바로 그 지점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허덕행 셰프

흥미로운 건 그의 요리 인생이 아주 어린 시절 시작됐다는 점이다. 보통 셰프들은 성장 후 자연스럽게 요리의 길로 들어서는 경우가 많지만, 허 셰프는 다섯 살 무렵 이미 자신의 꿈을 발견했다고 한다. TV에서 스테이크 굽는 장면을 봤는데 너무 멋있었다. 팬 위에서 고기가 익어가며 만들어내는 소리, 불꽃, 육즙의 움직임과 같은 요리의 모든 요소가 어린아이의 눈에는 하나의 영화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대부분은 스쳐 지나갈 순간이지만, 그는 달랐다.

그날 이후 부모에게 끊임없이 요리사가 되고 싶다고 이야기했고, 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겨우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조건은 만만치 않았다. 2년 안에 요리 관련 자격증 5개를 모두 취득하라는 부모의 요청사항은 어린 학생에게 결코 쉬운 목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약속을 지켜냈다. 그 시간은 단순히 자격증을 따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자신이 정말 요리를 사랑하는 사람인지 스스로 증명해내는 과정이었다고 말한다.



이후 그는 요리학원 강사로 일하며 기본기를 다졌고, 호텔조리학과에 진학해 보다 체계적으로 요리를 배웠다. 군 복무 시절에는 취사병으로 근무했고, 제대 후에는 복학과 동시에 현장에 뛰어들었다. 파인다이닝부터 모던 그릴까지 다양한 장르를 경험하며 자신만의 조리 철학과 감각을 다듬어갔다.

하지만 허 셰프의 이야기를 더 특별하게 만드는 건 화려한 경력보다도 ‘사람’이다. 그가 가장 존경하는 멘토는 유명 셰프가 아니다. 바로 30년 넘게 영양사로 일해온 그의 어머니다.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재료 손질과 위생 관리, 기본적인 조리 습관을 매우 엄격하게 가르쳤다. 그는 지금도 요리를 대하는 태도와 기본기의 중요성을 어머니에게서 배웠다고 이야기한다. “기술은 시간이 지나면 늘 수 있지만, 요리를 대하는 마음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 것 같아요.”

 

르뵈프 스테이크

실제로 허 셰프의 음식을 경험해보면 화려함보다 ‘균형감’이 먼저 느껴진다. 과한 장식이나 복잡한 기교보다는 재료 자체가 가장 맛있는 상태에 도달하도록 만드는 데 집중한다. 그리고 그 철학은 그가 운영하는 르뵈프라는 공간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르뵈프는 프랑스어로 ‘소고기’를 뜻한다. 이름 그대로 스테이크를 중심으로 한 레스토랑이지만, 단순히 좋은 원육만을 강조하는 곳은 아니다. 허 셰프는 익숙한 조리 방식을 반복하기보다 자신만의 숙성법과 조리 과정을 통해 재료의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데 집중한다.

그의 첫 번째 시그니처 메뉴인 르뵈프 스테이크는 최소 45일 이상의 자체 숙성 과정을 거친다. 숙성은 단순히 시간을 기다리는 일이 아니다. 온도와 습도, 육질의 상태를 매일 확인하며 가장 이상적인 풍미가 완성되는 시점을 찾아내야 하는 작업이다. 그렇게 완성된 고기는 좋은 소금과 후추만으로 시즈닝한 뒤, 르뵈프만의 조리 방식으로 마무리된다. 허 셰프는 스테이크를 설명하면서 “육향”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단순히 부드럽고 맛있는 고기가 아니라, 입안 가득 퍼지는 깊은 향과 풍미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의미다.

실제로 르뵈프 스테이크는 첫입에서 강렬한 풍미가 터지기보다는, 씹을수록 농축된 고기의 향이 천천히 퍼지는 스타일에 가깝다. 과한 버터나 향신료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고기 자체의 매력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굽기다. 겉면은 높은 온도로 빠르게 시어링해 깊은 마이야르 풍미를 만들어내면서도 내부는 안정적으로 육즙을 머금고 있다. 겉은 짙은 풍미를 품고 있지만 속은 부드럽고 촉촉하게 유지되며, 씹는 순간 육즙과 숙성육 특유의 깊은 향이 동시에 퍼진다.

함께 제공되는 그레이비 소스 또한 르뵈프 스테이크의 중요한 요소다. 보통 소스는 메인 재료 위에 존재감을 드러내기 마련이지만, 허 셰프의 소스는 다르다. 재료를 압도하기보다 뒤에서 받치며 육향을 한층 더 끌어올리는 역할에 가깝다. 오랜 시간 끓여낸 농축된 풍미 속에서도 짠맛이나 자극적인 맛은 절제되어 있고, 고기의 결을 더욱 또렷하게 느끼게 만든다. 그는 “소스는 메인을 돋보이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르뵈프의 스테이크는 소스조차 하나의 조연처럼 움직인다. 메인 재료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방식이다.

 

문어 풀포

두 번째 시그니처 메뉴는 문어 풀포다. 문어는 하루 이상 숙성과 연육 과정을 거친 뒤 저온 조리를 통해 완성된다. 질긴 식감을 떠올리게 하는 일반적인 문어 요리와 달리, 르뵈프의 문어는 놀라울 정도로 부드럽다. 그는 이 식감을 “카스텔라처럼 부드럽다”고 표현했다. 실제로 포크를 넣는 순간부터 결이 쉽게 풀릴 정도로 연하다. 하지만 단순히 흐물거리는 식감이 아니라, 문어 특유의 탄성과 감칠맛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저온 조리를 통해 수분과 풍미를 안정적으로 가둔 덕분이다. 입안에서는 부드럽게 풀어지면서도 끝에는 은은한 바다 향과 감칠맛이 길게 남는다.

 

유한나 푸드칼럼니스트

여기에 곁들여지는 살사베르데 소스는 문어의 풍미를 훨씬 입체적으로 만든다. 허브의 산뜻함과 은은한 산미가 더해지면서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문어 요리에 균형감을 만들어낸다. 특히 숙성된 문어의 깊은 맛 위로 허브의 향이 지나가며 전체적인 맛의 레이어를 훨씬 풍성하게 만든다. 흥미로운 건 허 셰프가 스테이크와 문어라는 서로 다른 재료를 다루는 방식에서도 공통된 철학이 느껴진다는 점이다. 그는 늘 재료 본연의 맛을 가장 먼저 생각한다. 요리를 무언가 과하게 더하는 작업이 아니라, 이미 재료 안에 존재하는 가장 좋은 순간을 찾아내는 과정이라고 바라본다.

“재료 속에 숨겨진 빛을 찾아내는 것 같아요.” 그의 이 말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육류라면 깊은 육향을, 해산물이라면 신선하고 담백한 감칠맛을 가장 이상적인 상태로 끌어내는 것. 그것이 허 셰프가 생각하는 좋은 요리다. 그는 셰프라는 직업의 가장 큰 매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힘든 순간에는 위로가 되고, 기쁜 순간에는 행복을 더 크게 만들어줄 수 있는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좋은 음식은 단순히 맛있는 음식이 아니다. 누군가의 하루를 기억에 남게 만드는 음식이다. 허 셰프는 오늘도 르뵈프의 주방 안에서 고기를 굽고 있지만, 어쩌면 그가 진짜 만들고 있는 것은 한 접시의 스테이크가 아니라 사람들의 ‘기억’인지도 모른다.

유한나 푸드칼럼니스트 hannah@food-fantas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