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조선의 현실은 암담했다. 나라를 빼앗겼고, 민중은 침묵을 강요당했다. 세계 열강은 약소국 조선의 운명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당시의 국제정세를 냉정하게 바라보면, 조선이 다시 독립국이 되리라고 확신할 만한 근거는 많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 제국은 영원할 것’이라는 체념이 사회를 짓눌렀다. 그러한 절망 속에서 어떤 이는 독립을 꿈꾸었고, 또 어떤 이는 현실에 순응했다. 후일 우리가 친일파라 부르게 된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 역시, 독립의 가능성을 비웃거나 포기했던 사람들 아니었을까.
그러나 끝내 역사는 누구의 손을 들어주었는가. 조국의 독립을 믿었던 사람들, 비록 조롱받고 감시받더라도 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던 사람들의 이름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김구 선생이 상하이 임시정부를 지키며 독립을 외쳤을 때, 누군가는 그를 비현실주의자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의 역사는 언제나 비웃음을 견디는 소수의 신념에서 시작되곤 했다.
최근 특정 종교단체 관련 수사 과정에서 한 종교인이 참고인 조사 중 “남북통일과 세계평화를 말하는 것은 ‘망상’”이라는 취지의 말을 들었다는 하소연을 접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마음 한편이 무거워졌다. 특정인의 위법 행위를 조사하는 일은 국가기관의 정당한 권한이다. 법치국가에서 법 집행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한 종교인이 평생 품어온 이상과 신념 자체를 조롱하는 태도까지 정당화될 수 있는지는 다른 문제다.
물론 통일과 세계평화는 현실적으로 너무 멀고 막막한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다. 남북관계는 얼어붙어 있고, 국제사회는 전쟁과 갈등이 끊이지 않는다. 강대국은 자국의 이익을 우선하며, 빈부격차는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종교인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오늘의 세계는 실로 절망스럽고 가슴 아픈 현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류가 평화를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대한민국이 통일의 가치를 버려야 하는 것일까. 전쟁과 갈등이 반복될수록 오히려 누군가는 끝까지 평화와 화해를 말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상을 말하는 사람들을 향해 “망상”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사회는 결국 스스로 미래를 포기하는 사회가 아닐까.
한쪽에서는 평화와 통일을 ‘망상’이라 부를지 몰라도, 대한민국 헌법은 이를 ‘사명’이라 부른다. 통일은 특정 종교만의 구호가 아니다. 세계평화 역시 어느 한 단체의 전유물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류가 끝까지 포기해서는 안 되는 보편적 가치에 가깝다. 구체적인 방법론에는 이견이 있을 수 있으며, 특정 단체의 활동에 대한 비판 역시 자유롭다. 그러나 평화와 통일이라는 이상 자체를 조롱의 대상으로 삼는 순간, 사회는 냉소주의 속으로 빠져들 위험이 있다.
역사를 돌아보면, 거대한 변화는 언제나 불가능해 보이는 꿈에서 시작되었다. 노예제 폐지, 여성 참정권 부여, 인종차별 철폐 역시 한때는 비현실적 이상론처럼 취급받았다. 하지만 인류는 그런 꿈을 끝내 현실로 만들어 왔다. 만약 당대의 한계를 넘어선 이상주의를 모두 망상이라 치부했다면, 인간 문명은 단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했을 것이다.
맹자는 “역천자는 망하고 순천자는 흥한다(逆天者亡 順天者興)”고 말했다.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자는 망하고, 시대와 도의 흐름을 따르는 자는 흥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하늘’은 단지 초월적 존재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이 끝내 포기해서는 안 되는 양심과 도덕, 공동체적 이상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그렇기에 평화와 통일을 향한 염원은 결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순리라 할 수 있다.
국가기관이 범죄 혐의를 수사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특정 종교인의 신념과 이상을 폄하하고, 평화와 통일에 대한 염원마저 ‘망상’으로 취급한다면 그것은 위험한 일이다. 민주국가는 사람의 행위를 법으로 판단해야지, 마음속 이상과 신앙까지 재단하려 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대한민국은 독립운동의 이상과 민주주의의 희생 위에 세워진 나라다. 과거 독립운동가들의 꿈을 오늘 우리가 존중받아야 할 역사로 기억한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누군가의 평화와 통일의 이상 또한 함부로 비웃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정서가 아무리 냉소주의라 할지라도, 끝내 세상은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 의해 역사는 움직여 왔다. 평화운동이든 독립운동이든, 그 출발점에는 언제나 현실을 넘어서는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역사는 그 믿음을 ‘망상’이라 부르던 사람들보다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았던 사람들의 편에 서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