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크림 발라달라” “다치면 소송”… 운동회 접는 학교들 [심층기획-운동장을 빼앗긴 아이들]

(하) 소송·민원에 무너진 학교들

“꼴등해서 상처” “선크림 발라달라”
교사들 학부모 무분별 민원 시달려
사고 땐 법적 책임… 방어막도 없어

운동회 소음 신고 7년 새 5배 증가
민원사고 법적책임 교사가 떠맡아
“아무것도 않는 게 상책” 행사 기피
서울 초교 12% 운동장 활동 제약

“소송 휘말리면 심리적 압박 심각”
교육부 등 당국 적극적 개입 필요
“사고 발생시 면책 기준 구체화도”
“저희 학교도 대운동회를 하지 않아요. 사실 선생님들이 많이 기피합니다. 행정적 부담도 크지만, 학교 밖에선 ‘시끄럽다’고 신고하고, 안에서는 학부모 민원이 쏟아집니다.”

 

인천 부평의 한 초등학교서 열린 운동회에서 어린이들이 머리위로 볼 나르기를 하고 있는 모습. 뉴시스

최근 학교 운동장 사용을 둘러싼 지역 주민과 학부모 민원이 빗발치면서 운동회 축소로 이어지는 데 대해 인천의 한 초등학교 A 교장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아이가 다치기라도 하면 바로 소송으로 번지니 누가 하고 싶겠냐.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속 편하다”며 현장에서 느끼는 무력감을 토로했다. 안전사고 발생 시 모든 법적 책임을 학교가 온전히 떠안아야 하는 구조적 모순까지 겹치면서 운동장 빗장을 걸어 잠그는 학교는 늘어나는 추세다.

 

19일 서울·부산교육청 등에 따르면 서울은 초등학교 8곳 중 1곳(12.4%)이, 부산은 3곳 중 1곳 이상(34.7%)이 운동장에서의 신체활동을 제약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장 표면적인 이유는 주민들의 소음 민원이다. 실제 운동회 소음 관련 112 신고는 2018년 70건에서 2025년 350건으로 7년 새 5배 급증했다. 이 중 98.5%인 345건에는 경찰이 직접 출동했다. 서울의 한 중학교 교장은 “민원인이 여러 명이라기보다 한 명이 지속적으로 112에 신고하는 경우가 더 많다”며 “계속 같은 신고가 들어오면 경찰은 학교로 출동하기 마련이고, 학교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내 아이만 챙기는 부모의 이기심”

 

운동회가 기피 대상이 된 건 소음 문제 때문만은 아니다.

 

교육 현장에선 학부모의 과도한 개입과 민원이 본질적인 원인으로 지목된다. ‘내 아이는 왜 안 챙기느냐’, ‘우리 애가 꼴등을 해서 의기소침해졌다’, ‘선크림을 꼭 챙겨 발라줘야 한다’는 등 무분별한 민원이 빗발친다는 것이다.

 

부산의 한 초등학교 B 교장은 “운동회가 끝나면 ‘우리 아이를 잘 관리 안 하신 것 같다’, ‘뒤에서 아이들이 다투고 있는데 뭐 했느냐’고 항의하는 학부모들이 늘 있다”며 “부모들은 내 아이를 중심으로만 지켜보기 때문에, 가뜩이나 정신없는 행사 중 이런 민원을 마주하는 선생님들은 운동회 자체를 기피하게 된다”고 토로했다.

 

맞벌이 가정이 늘면서 참관하지 못하는 부모의 아이들이 느끼는 위화감도 학교 측에는 부담이다.

 

결국 많은 학교가 전교생이 모이는 대운동회 대신, 실내 강당에서 2개 학년씩 묶어 소규모로 진행하거나 외부인 참관을 통제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다.

 

최하철 대전유천초 교장(전 대전교총 회장)은 “교육계가 수요자 중심이 되다 보니 교사들은 ‘을’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며 “그렇다 보니 소송까지 가서 힘들 바에 애초에 위축되는 경향이 있다. 우리 학교도 대강당을 이용해서 시간대별, 날짜별로 분산해 체육대회를 한다. (한 번 할 걸) 민원을 우려해 오히려 두 번을 더 하게 된다”고 밝혔다.

 

◆교육청 방관, 학교장·교사에 책임 전가

 

더 큰 문제는 민원과 사고의 법적 책임을 학교장이나 교사 개인에게 미루는 구조다.

 

현행법상 학교 시설 개방이나 주요 행사 진행은 ‘학교장 재량’이다. 언뜻 자율성을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민원이나 소송이 발생하면 모든 인사상 불이익과 법적 책임을 개인이 오롯이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다.

 

결국 대부분의 학교들이 ‘교육적 의미’와 ‘운동장 폐쇄’ 중 재량껏 취사선택을 해야 하는 형편이다. B 교장은 “교장이 전면 책임지고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민원이나 사고가 발생했을 때 학교나 교사를 위한 방어막이 사실상 전무하다”고 했다.

 

학교 현장의 소극 행정이 심화되는 이유로 ‘교육청의 방관’을 지목하는 목소리도 있다.

 

최 교장은 “현장학습이나 운동회 관련 민원을 받았을 때 어떻게 해야 하냐고 교육청에 물어보면 대부분 ‘학교장 판단 하에 잘 알아서 하시라’라는 답변이 온다”며 “나중에 안 좋은 결과가 예상되는 사안에 대해선 회피성으로 학교에 떠맡기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그는 “상위기관이 책임을 회피하니 학교마다 기준이 달라져 비교가 되고, 결국 교직원 간 갈등으로 이어진다”며 “교육청은 상부 기관으로서 주도권을 갖고 확실한 선을 잡아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B 교장도 “교육청이 제3자처럼 민원을 학교에 전달하는 역할만 할 게 아니라 직접 당사자라는 의식을 갖고 민원인을 응대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사후 법률 서비스도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하고 있다. A 교장은 “선생님들은 한 번도 소송에 휘말려 본 적 없는 분들인데 교육활동을 하다가 그런 상황에 놓이는 것”이라며 “사태가 벌어진 후 국가나 교육청이 변호사비를 대준다고 하더라도 소송에 따른 교사들의 심리적 압박감과 사기 저하는 해결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교육당국, 적극 개입 필요”

 

전문가들은 교사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른 법률 서비스 부담과 심리적 압박을 해소하기 위해 교육 당국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교육부나 교육청이 민원을 응대하는 ‘단일 창구’로 기능하며 주도적으로 민원을 관리·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덕난 국회입법조사처 교육문화팀장은 “교육과 관련된 민원들을 하는 교육부·교육청·경찰·복지부 등 관계기관들이 무분별한 민원에 제대로 대응을 안 해 이러한 상황이 초래된 것”이라며 “악의적인 민원 남발로 인해 학생과 학부모, 시민들의 권리가 침해당하는 상황이 없도록 적절한 개입이 필요하다고 본다”고 제언했다.

 

박주형 경인교대 교수도 “학교는 엄연히 교육부와 교육청 산하다. 소음이나 민원이 발생할 수 있는 행사가 있다면 교육부가 경찰과 사전 협의를 통해 (대응법을) 공유하는 등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육 현장에서는 체육활동 중 안전사고 발생 시 학교안전법상 교원 면책 기준을 보다 구체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현행 학교안전법상 학교장, 교직원 등이 학생에 안전조치 의무를 다한 경우 학교 안전사고에 대해 민·형사상 책임을 지지 않는다. 하지만 ‘안전조치 의무’의 범위와 면책 기준이 모호해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이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관계자는 “학교 안전사고 관련 학교안전공제회에서 치료비와 위로금(일부 경우)을 지급하고는 있으나, 일부 학부모들은 여전히 교사 상대 민·형사 소송을 제기하거나, 소송을 걸지 않는 대신 교사에게 보상금을 요구하는 악성민원을 제기한다”며 “교사들은 이 같은 환경에서는 제대로 교육활동을 펼치지 못하고 운동장 사용 허가나 현장체험학습도 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관계자는 “학교 안전사고로 인한 법적 책임에서 교사들이 벗어날 수 있는 법적 보호 장치 마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