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는 대개 하나의 실수로 일어나지 않는다. 안전공학에는 ‘스위스 치즈 모델’이 있다. 치즈 덩어리 안에는 구멍이 많지만 빛이 통과하지 못한다. 그러나 여러 개의 치즈 구멍이 우연히 한 줄로 맞으면 빛은 그대로 지나간다. 재난도 그렇다. 한 사람의 착각, 한 줄의 부주의, 한 번의 검토 누락이 따로 있을 때는 사고가 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여러 방어막이 동시에 뚫리면 결국 사회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 바깥으로 나온다.
스타벅스의 ‘탱크데이’가 바로 그런 사건이다. 2026년 5월 18일, 스타벅스코리아는 텀블러 행사를 진행하면서 탱크데이라는 표현을 썼고 홍보 문구에는 ‘책상에 탁!’이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논란이 커지자 스타벅스는 문구를 바꾸고 삭제한 뒤 행사를 중단하고 사과했다. 시민들은 이 표현들이 5·18민주화운동 당시의 군 폭력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 권력의 거짓 발표를 떠올리게 한다고 비판했다.
물론 회사는 특정한 의도가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보아 의미는 의도 속에만 있지 않다. 인간의 뇌는 단어를 사전처럼 읽지 않는다. 단어는 날짜와 이미지와 기억 속에서 다시 조립된다. 평범한 날의 탱크는 그저 상품명일 수 있다. 그러나 5월 18일의 탱크는 다르다. 한국 사회의 기억 속에서 그날의 탱크는 광주의 거리, 시민의 공포, 국가폭력의 그림자를 불러오는 단서가 된다. 기억은 중립적인 창고가 아니다. 특정 단어와 감정이 연결되면 뇌는 매우 빠르게 과거의 장면을 현재로 불러낸다.
‘책상에 탁!’이라는 표현은 더 심각하다. 한국 현대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쉽게 지나치기 어려운 문장이다. 그런데도 이 문구가 기획되고 디자인되고 승인되고 고객 앞에 게시될 때까지 조직 안의 누구도 멈춰 세우지 못했다. 이것은 개인의 말실수가 아니라 시스템의 실패다. 카피라이터의 구멍, 마케팅 담당자의 구멍, 일정 검토의 구멍, 역사 감수성의 구멍, 최종 승인자의 구멍이 한 줄로 겹친 것이다.
기업은 종종 논란이 생기면 “불편을 끼쳐 죄송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번 일은 단순히 고객이 불편했던 사건이 아니다. 사회의 기억을 함부로 건드린 사건이다. 5월 18일은 달력 속의 평범한 하루가 아니다. 한국 사회가 해마다 국가폭력과 민주주의의 의미를 되새기는 날이다. 기념일은 공동체의 기억 장치다. 그날 어떤 단어를 쓰는가는 단순한 마케팅 기술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의 문제다.
더구나 스타벅스는 작은 동네 가게가 아니다. 커피만 파는 회사도 아니다. 스타벅스는 공간, 감각, 취향, 일상의 이미지를 함께 파는 거대 브랜드다. 그런 기업일수록 언어와 상징에 민감해야 한다. 원두의 향미와 컵의 색감은 섬세하게 관리하면서 사회의 아픈 기억을 건드리는 단어에는 둔감했다면 그것은 브랜드의 자기모순이다. 지역의 거리에서 장사하고 시민의 일상에서 이익을 얻는 기업이라면 그 사회의 아픈 날짜도 함께 배워야 한다.
사과문 한 장으로 충분하지 않다. 필요한 것은 구멍을 메우는 일이다. 역사적 기념일 검수표, 민감 표현 데이터베이스, 외부 자문, 지역사회와의 소통, 최종 승인 단계에서의 사회적 위험 점검이 필요하다. 스위스 치즈 모델의 교훈은 단순하다. 인간은 실수한다. 그래서 조직에는 실수를 막는 여러 겹의 장치가 있어야 한다.
스타벅스코리아의 위기는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2022년에는 ‘서머 캐리백’에서 발암물질 폼알데하이드가 검출돼 큰 물의를 빚었다. 그때는 제품 안전의 구멍이고 이번에는 역사 감수성의 구멍이다. 여기에 신세계그룹 오너를 둘러싼 과거의 정치적 발언 논란까지 떠올리면 이것은 단순한 마케팅 실수로만 보이지 않는다. 5월 18일의 ‘탱크’는 우연히 튀어나온 단어 하나가 아니다. 그것은 스타벅스 조직 곳곳에 나 있던 구멍들이 한 줄로 겹친 결과다.
제품 안전에서 구멍이 나고, 오너의 언어에서 구멍이 나고, 이제는 5월 18일의 역사적 기억 앞에서 또 구멍이 났다. 이것은 불운이 아니라 체질이다. 나는 바로 그 체질에 분노한다. 이번에 드러난 구멍을 제대로 메우지 않는다면 다음에도 빛은 그 구멍을 그대로 통과할 것이다.
이정모 전 국립과천과학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