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관하여/ 수전 손택/ 홍한별 옮김/ 윌북/ 2만2000원
20세기 후반 세계 지성사의 한복판에서 소설가이자 예술비평가인 수전 손택(1933∼2004·사진)은 언제나 날카로운 이름이었다. 그는 ‘해석에 반대한다’를 통해 서구 비평계의 내용 중심주의를 뒤흔들었고, ‘사진에 관하여’와 ‘타인의 고통’에서는 이미지 과잉 시대의 윤리적 위기를 누구보다 먼저 포착해 냈다. 냉철한 분석과 도발적인 사유로 기억되는 손택은 오랫동안 ‘텍스트를 해부하는 지성’으로 각인돼 왔다.
그러나 그의 사후 20년 만에 처음 출간된 유고집 ‘영화에 관하여’는 이러한 익숙한 손택의 이미지를 뒤집는다. 미국에서는 내년 출간 예정으로, 원서보다 한국어판이 먼저 출간된 이 책은 비평가와 문학가라는 틀 안에 갇혀 있던 손택을 꺼내어, 영화에 평생을 바친 시네필(cinephile)이자 영화감독으로서의 모습을 전면에 내세운다.
“내가 글을 쓰지 않고 있을 때, 나는 언제나 영화관에 있었다.” 손택의 이 고백처럼 영화는 그에게 단순한 취미나 오락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감각이자 또 하나의 삶이었다. 책에는 1960년대 초부터 2004년 타계 직전까지 그가 남긴 영화 관련 글 32편이 담겼다. 비평과 인터뷰, 강연, 일기, 편지 등 형식도 다양하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손택이 영화가 아직 진지한 예술로 대접받지 못하던 시절부터 이를 가장 중요한 현대 예술 가운데 하나로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그는 장뤼크 고다르, 로베르 브레송,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같은 감독들을 적극적으로 소개하며 영화 예술의 지평을 넓혀 갔다.
저자는 1996년 ‘뉴욕타임스’에 발표된 에세이 ‘영화의 한 세기’와 ‘영화의 쇠퇴(The Decay of Cinema)’를 심층적으로 복기한다. 손택은 이미 30년 전 오늘날의 현실을 놀라울 만큼 정확하게 예견했다. 대형 자본이 주도하는 상업 영화 시스템, 끝없이 범람하는 이미지, 영화관 공동체의 해체 그리고 영화를 깊이 사랑하는 ‘시네필리아’의 쇠퇴를 그는 누구보다 먼저 감지했다.
오늘날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플랫폼과 쇼트폼 콘텐츠, 인공지능(AI) 알고리즘이 지배하는 환경 속에서 손택의 통찰은 더욱 섬뜩하게 다가온다. 그는 사람들이 더 이상 영화에 몰입하지 못하고, 영화를 하나의 경험이 아니라 빠르게 소비되는 콘텐츠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고 우려했다.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영상을 무의식적으로 넘겨보는 오늘의 풍경은 그의 경고를 현실로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