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룩의 간까지 빼먹나’…생활체육 선결제의 덫 ‘헬스장 먹튀’ [권준영의 머니볼]

“PT·회원권 선결제만 250만원”…폐업 직전까지 신규 회원 모집한 헬스장
‘오늘만 반값’ 유혹에 당했다…2030세대에 집중된 피트니스 ‘기획 폐업 의혹’
문 닫기 14일 전 통보 의무화되지만…소비자 피해 구제 ‘여전히 후순위’

출근 전 운동을 하려던 직장인 A씨는 평소처럼 헬스장 앱을 켰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예약 화면이 갑자기 닫혀 있었다. 전날까지만 해도 트레이너는 ‘곧 여름 시즌이라 PT 자리 금방 찬다’며 추가 등록을 권했다고 한다.

 

불안한 마음에 헬스장으로 향한 A씨는 입구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불이 꺼진 유리문에는 종이 한 장이 붙어 있었다.

 

“내부 사정으로 영업을 종료합니다.”

 

문은 잠겨 있었고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두 달 전 결제한 1년 회원권과 PT 패키지 비용만 250만원이 넘었다고 한다. 회원들이 모인 단체 채팅방에는 ‘폐업 직전까지 신규 회원을 받았다’, ‘카드 할부만 남았다’, ‘대표와 연락이 끊겼다’ 등의 반응이 쏟아졌다.

 

위 사진은 AI(인공지능)를 활용해 생성된 가상의 이미지입니다. OpenAI의 대화형 인공지능 ChatGPT 생성 이미지.

헬스장 장기 회원권과 고액 PT 선결제를 둘러싼 소비자 피해가 전국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다. 할인 이벤트로 회원을 대거 모집한 뒤 돌연 폐업하거나 연락을 끊는 사례가 반복되면서 생활체육 시장의 ‘어두운 민낯’이 드러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일이 더 이상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는 점이다. 헬스장·필라테스·요가 등 체육시설 업종은 한국소비자원 소비자 분쟁 상위권에 꾸준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환불 거부와 계약 해지 지연, 폐업 후 연락 두절 등이 끊이지 않는 대표 업종 중 하나다.

 

생활체육 시장 규모는 최근 몇 년 사이 급팽창했다. 한국소비자원과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 자료에 따르면 전국 체력단련장(헬스장) 수는 2021년 1만1144곳에서 2022년 1만2669곳, 2023년 1만4773곳으로 급증했다. 불과 2년 만에 약 32.6% 증가한 셈이다. 일부 자료에서는 2019년 대비 증가율이 80%를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시장 성장 속도만큼 소비자 보호 장치는 따라가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 한국소비자원에 접수된 헬스장 관련 피해구제 신청은 2022년부터 2025년 3월까지 총 1만104건에 달했다. 2025년 1분기 피해구제 신청 건수는 873건으로 전년 동기 대비 17.8% 증가했다. 전체 피해의 약 92%는 계약 해지·환불 분쟁 관련이었다. 피해구제 신청의 약 80%는 20·30세대에 집중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업계 안팎에서는 국내 피트니스 시장이 ‘고회전 자영업 구조’에 빠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새 헬스장이 대형 할인 이벤트와 장기 회원권 판매로 회원을 끌어모으고, PT 선결제로 현금을 확보한 뒤 과열 경쟁과 고정비 부담을 버티지 못하고 폐업하는 흐름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이후 같은 자리나 인근 상권에 또 다른 헬스장이 들어서며 비슷한 할인 경쟁이 다시 시작되는 구조다. 실제 PT 시장에서는 10회 패키지가 수십만원대, 장기 패키지는 100만~300만원 안팎까지 형성되는 경우도 흔하다.

 

문제는 경영 상황이 악화될수록 할인 공세가 오히려 더 거세진다는 점이다. ‘오늘만 반값’, ‘PT 100회 한정 특가’, ‘연회원 마지막 모집’ 같은 문구로 소비자를 끌어모은 뒤, 신규 회원의 선결제 자금으로 기존 임대료와 운영비를 메우는 행태가 업계 전반에 고착화됐다. 소비자가 미리 낸 돈이 운동 서비스 구매 비용이 아닌 ‘사업자의 위험한 밑천’으로 쓰이는 셈이다. 신규 회원의 선결제 자금으로 기존 임대료와 고정비를 메우는 구조다 보니, 신규 유입이 멈추는 순간 연쇄 폐업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시한폭탄 같은 재무 구조라는 지적도 나온다.

 

문제는 법적으로도 소비자 위치가 극도로 불리하다는 데 있다. 헬스장이 폐업하면 임대료와 세금, 금융권 채권 등이 우선 처리되고 회원권 환불은 후순위로 밀리는 경우가 많다. 소비자는 사실상 담보 없이 돈을 빌려준 채권자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다.

 

여기에 점포별로 법인을 쪼개 운영하거나 폐업 뒤 다른 이름으로 재개업하는 사례까지 겹치면서 피해 회복은 더 어려워지고 있다. 복수의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간판만 바꿔 다시 영업한다’, ‘대표 이름만 바뀌었다’는 폭로도 이어진다.

 

위 사진은 AI(인공지능)를 활용해 생성된 가상의 이미지입니다. 구글의 AI Gemini 생성 이미지

반복되는 선결제 피해 논란에 정부는 뒤늦게 제도 손질에 나섰다. 공정거래위원회는 2025년 체력단련장 이용 표준약관을 개정해 헬스장이 휴·폐업 예정 사실을 최소 14일 전에 이용자에게 통지하도록 했다. PT 역시 표준약관 적용 대상이라는 점도 명확히 했다. 또 보증보험 가입 여부와 보장 내용 등을 소비자에게 고지하도록 했다.

 

정치권에서도 관련 입법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김재섭 국민의힘 의원은 올해 초 체육시설의 고의 폐업 피해를 막기 위한 체육시설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개정안에는 악의적·고의적 휴·폐업 사업자의 재등록 제한과 소비자 보호 강화 등의 내용이 담겼다. 부산 지역에서 발생한 대규모 헬스장 폐업 사태 이후에는 선불 이용료를 받는 체육시설업자의 보증보험 가입을 의무화하는 법안도 추가로 발의됐다.

 

해외 일부 국가에서는 장기 회원권 선결제에 대해 보증보험이나 신탁(에스크로) 등 별도의 소비자 보호 장치를 운영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 일부 피트니스 업체들이 선불금을 별도 계좌나 신탁 방식으로 관리하고 있으며, 유럽 일부 국가에서는 사업자 폐업 시 소비자 환급이 가능하도록 보험 가입을 의무화하는 등 안전장치를 두고 있다.

 

반면 한국은 여행업·상조업 등 일부 선불형 업종에만 환급·보상 체계가 적용될 뿐, 헬스장·필라테스 등 체육시설업은 제도적 보호 장치가 상대적으로 취약한 영역으로 남아 있다.

 

결국 소비자는 ‘할인’이라는 말에 큰돈을 먼저 내지만, 사업자가 무너지는 순간 가장 마지막 순서로 밀려난다. 선결제를 기반으로 한 생활체육 시장이 빠르게 성장했지만, 소비자 보호 장치는 여전히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제도 밖에 놓인 선불 구조가 피해를 개인의 책임으로 환원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