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오신날에 비친 대통령의 국정철학 [종교칼럼]

불기 2570년 부처님오신날인 24일 이재명 대통령의 행보는 종교 행사 참석을 넘어선 깊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대통령은 이날 조계종 조계사와 천태종 관문사, 태고종 청련사를 차례로 방문했다.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불교 3대 종단 사찰을 모두 찾은 일정이었다고 한다. 그는 축사에서 “각자도생이 아닌 공존과 상생”을 강조했고, “원융회통”, “화쟁”, “자타불이” 같은 불교적 가치를 국정 운영의 언어로 풀어냈다. 그리고 그 전날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추모하며 “반칙과 특권을 걷어내는 개혁”을 언급했다. 이틀간 이어진 대통령의 메시지는 얼핏 서로 다른 듯 보이지만, 사실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져 있었다.

 

대통령의 발언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매우 세밀하게 바라보려는 시선이 읽힌다. 특히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이들, 삶의 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들에 대한 감수성이 강하게 묻어난다. “국민의 목숨을 살리는 정부”라는 표현은 정치적 수사만은 아니다. 그 말 속에는 국가는 단지 경제 성장만 책임지는 조직이 아니라, 고통받는 국민의 삶과 생명을 끝까지 붙들어야 한다는 국가관이 담겨 있다.

 

그래서인지 대통령의 언어에서는 사람에 대한 따뜻함과 함께, 특권 구조와 기득권에 대한 경계심 역시 동시에 느껴진다. 여기서 말하는 기득권은 단순히 부유한 계층만을 뜻하지 않는다. 오랜 시간 영향력과 권한을 독점해 온 정치권과 경제권력, 거대 조직 등 제도권 전체가 이에 해당한다. 대통령은 “반칙과 특권”을 걷어내겠다고 말했다. 그것은 결국 공동체 안에서 일부만 더 많은 기회를 움켜쥐는 구조를 바꾸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정성수 종교전문기자

이 대통령은 부처님오신날 축사에서 “미움은 미움으로 사라지지 않고 오직 자비로써 사라진다”는 말을 인용했다. 또 “내 마음이 평온해야 세상이 평화롭다”는 부처의 가르침도 언급했다. 갈등과 대립의 시대일수록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고 품어야 한다는 메시지였다. 불교의 화쟁 정신을 국정철학의 언어로 가져온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서로 다른 생각과 입장을 완전히 제거해야 할 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태도 말이다.

 

이 대통령의 이러한 시선은 최근 사회 현안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는 글로벌 거대 기업인 스타벅스의 무성의한 공공성 문제를 두고 강하게 질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특정 기업을 겨냥했다기보다 힘이 커지고 이익이 늘어날수록 공동체에 대한 책임과 소외계층에 대한 배려 역시 커져야 한다는 인식에 기반한다. 결국 대통령의 관심은 언제나 ‘힘 있는 곳’ 자체보다 그 힘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 쪽을 향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핵심은 편 가르기가 아니다. 대통령이 강조하는 공존과 상생의 철학은 이러한 기업이나 주류 사회에서 외면받는 특정 집단을 영원히 배제하겠다는 뜻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더 큰 사회적 책임과 공동체 의식을 요청하는 것에 가깝다. 진정한 상생과 개혁의 정신은 단죄나 배척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주체가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데 있기 때문이다. 만약 스타벅스와 같은 거대 기업이나 사회의 영향력 있는 집단들이 자신들의 역할과 책임을 깊이 성찰하며, 약자와 공동체를 위해 더 많이 나누고 더 낮은 곳으로 향한다면, 정부나 대통령이 이들을 품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결국 대통령이 말하는 개혁 역시 누군가를 무너뜨리거나 배척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니다. 기득권이 태도를 바꾸어 공동체 전체가 조금 더 따뜻한 방향으로 이동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요청인 것이다.

 

이 지점에서 오늘날 우리 사회의 종교 역시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종교는 본래 상처 입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외로운 이웃을 품으며,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존재해 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일부 종교는 거대한 조직과 제도 속에서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하나의 권력이 되기도 했다. 물론 종교는 지금도 봉사와 구호, 나눔뿐만 아니라 국경을 넘는 평화운동과 민간 외교의 현장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많은 신앙인들이 이름도 빛도 없이 어려운 이웃을 돕고 있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오늘날 시민들은 종교의 이름이나 기성 사회의 평가보다, 그들이 궁극적으로 누구의 곁에 서 있는가를 더 중요하게 바라본다. 세계적인 무대에서 거대 담론을 이끄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가난한 사람과 외로운 노인, 절망 속에 있는 청년과 장애인, 돌봄이 필요한 이웃을 얼마나 품고 있는지를 본다. 종교의 진정성은 결국 가장 낮은 곳으로 얼마나 내려갈 수 있는가에 의해 증명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대통령이 부처님오신날에 강조한 “서로 경쟁하며 살아남는 사회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들자”는 요청은 정치권력이나 경제권력만을 향한 경고가 아니었다. 우리 사회 전체를 향한 질문에 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