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건반 위로 쏟아지는 여든여섯 살 거장의 손놀림에는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
24일 오후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88잔디마당(메이 포레스트). '제18회 서울재즈페스티벌 2026'(서재페)의 세 번째 날 피날레를 장식한 미국 재즈 거장 허비 행콕(86)은 음악이 어떻게 늙지 않고 요동하는지를 실시간으로 증명해 냈다. 2015년 5월 역시 서재페 무대에서 피아노 거장 칙 코리아(Chick Corea)와 협연한 이후 11년 만에 한국을 찾은 그는 약 90분 동안 혁신적인 대담함과 유쾌한 반항기로 봄밤의 야외 무대를 완벽하게 장악했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거칠고 굳은 손가락 끝에서 외려 가장 부드럽고 유연한 재즈가 탄생하는 순간은 미학적 경탄을 자아냈다. '워터멜론 맨(Watermelon Man)'과 '액추얼 프루프(Actual Proof)'로 포문을 연 무대는 '라이오넬/펠릭스 2019(Lionel/Felix 2019)'로 이어지며 단숨에 객석을 몰입시켰다. 노년의 나이는 유려한 기술과 압도적인 그루브 앞에서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신시사이저의 반짝임과 건반 위로 쏟아지는 피아노 소리는 무대 위를 자유롭게 유영했다. 행콕뿐만 아니라 그와 호흡을 맞춘 밴드 역시 색소폰의 여유로움, 베이스의 묵직함, 드럼의 집중력을 치밀하게 유지하며 거장의 위트와 에너지를 고스란히 나눠 가졌다.
'풋프린츠(Footprints)'를 연주하기 전, 행콕은 2023년 별세한 미국의 전설적인 색소폰 연주자이자 '재즈 혁신가'로 불린 동료 웨인 쇼터(Wayne Shorter)를 나직이 회고했다. 여전히 자신의 마음속에 깊이 남아 있다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그리움이 묻어났다. 그러나 행콕은 이 곡을 결코 슬프게 연주하지 않았다. 상실의 흔적을 애도에 묶어두는 대신 생동감 넘치는 선율로 들려주며 과거의 기억이 박제당하는 것을 완강히 거부했다. 죽음마저 현재의 활기로 치환하는 거장의 태도는 음악이 지닌 영원한 실존을 보여주는 듯했다.
'시크릿 소스(Secret Sauce)'를 지나 무대의 열기가 최고조에 달한 '행 업 유어 행 업스(Hang Up Your Hang Ups)' 파트에 이르자, 행콕은 키보드를 어깨에 메고 무대 앞으로 걸어 나왔다. 피아노와 키보드, 그리고 키타(Keytar·기타처럼 어깨에 메는 키보드)를 번갈아 연주하며 그려내는 펑키한 순간은 객석을 뒤흔들었다. 마지막 곡 '카멜레온(Chameleon)'을 연주할 때도 그는 키타를 멘 채 온몸으로 덩실덩실 거리며 흥겨운 그루브를 탔다. 그에게선 거장의 권위 대신 특유의 장난기가 읽혔는데, 이는 나이라는 물리적 한계를 가볍게 초월하여 무대를 장악하는 유쾌하고도 반항적인 에너지였다.
이 무한한 에너지는 20대를 비롯한 젊은 관객층에게도 고스란히 가닿았다. 부친 윤상을 닮아 베이스 연주에도 일가견이 있는 그룹 '라이즈(RIIZE)'의 멤버 앤톤(이찬영)이 당일 현장에 가지 못한 아쉬움을 팬들과의 소통 플랫폼에서 털어놓았을 만큼, 행콕의 음악은 젠지(Gen Z) 세대에게도 뜨겁게 통하는 현재진행형의 유산이었다. 모든 무대가 끝난 뒤 행콕이 자신의 손자를 무대 위에 올려 관객에게 소개하며 환하게 웃을 때, 객석에선 세대를 초월한 존경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음악적 경계를 넓히며 다양한 장르를 포섭해 온 서재페의 여정 속에서, 이번 행콕의 무대는 페스티벌의 뿌리와 핵심이 결국 '재즈'에 있음을 명징하게 각인시켰다. 존경받을 만한 뮤지션은 과거의 성취에 안주하지 않고 스스로의 세계를 끊임없이 앞으로 밀고 나간다. 행콕은 과거의 위대한 유산이 어떻게 낡지 않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지, 그 서정적이고도 대담한 모범을 몸소 보여줬다.
<뉴시스>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