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세 철학자 김형석 교수 곁을 20년 넘게 지켜온 수필가 이종옥의 산문집이다. 한 사람의 인생 고백이자, 상처 입은 시대를 향한 따뜻한 위로를 담고 있다. 남편과의 사별, 생계의 막막함, 세 아이를 홀로 키워야 했던 절망 속에서도 끝내 삶을 포기하지 않았던 한 여성의 기록은 잔잔하지만 오래 남는 울림을 전한다.
책은 단순한 회고록이나 신앙 에세이에 머물지 않는다. 한국 사회의 가장 낮고 어두운 곳에서 오랜 세월 생명의전화를 통해 상담 봉사를 하고, 한국 최초의 여성 노숙인 쉼터인 아가페의집 초대 원장으로 활동했던 저자의 삶은 ‘살아낸 이야기’ 자체로 묵직한 설득력을 지닌다.
추천사를 쓴 김형석 교수는 저자의 삶을 두고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고 믿음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의 길”이라 표현했다. 실제로 책 곳곳에는 인간의 한계 앞에서도 끝내 무너지지 않으려는 의지와 신앙의 힘이 담겨 있다. “보석 같은 지아비가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 빠져나가듯 영원을 향해 갔다”는 문장은 상실의 깊이를 처연하게 드러내면서도, 그 슬픔을 견디며 살아내야 했던 시간을 고스란히 전한다.
책의 큰 미덕은 비극을 과장하지 않는 담담함이다. 저자는 남편을 잃은 뒤의 절망을 토로하면서도 삶의 기쁨과 성취 역시 함께 존재했음을 고백한다. 그래서 그의 문장은 비탄에만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을 통과하며 인간이 어떻게 조금씩 단단해지는지를 보여준다. “상실은 나를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세상과 다시 마주 서게 한 힘이었다”는 문장은 책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다.
김형석 교수와의 오랜 인연도 눈길을 끈다. 50여 년 전 성경 공부 인연으로 시작된 만남은 김형석 교수와의 인연은 20년 넘은 지금까지 동행으로 이어졌다. 특히 KBS <인간극장> ‘백 년을 살아보니’ 촬영을 위해 폭설 속 강원도 양구로 향하던 장면은 인상 깊다. 눈보라로 시야조차 확보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저자는 “넘고 가야 할 길이라면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넘고 가는 길을 택한다”고 말한다. 삶 자체가 하나의 마라톤이었던 그의 태도가 응축된 대목이다.
저자의 또 다른 축은 ‘봉사’다. 생명의전화 상담원으로 수십 년간 활동하며 마주했던 수많은 사연은 저자를 더욱 깊고 단단하게 만들었다. “한 통의 전화에 담긴 공감과 조용한 사랑이 누군가에게 다시 살아갈 용기가 될 수 있다”는 고백에는 인간에 대한 신뢰와 연민이 스며 있다. 오늘날 점점 각박해지는 사회에서 타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일이 얼마나 귀한가를 새삼 돌아보게 한다.
저자의 문장은 화려하거나 기교적이지 않다. 대신 오래된 일기장처럼 진솔하고, 때로는 기도문처럼 고요하다. 고향 들녘의 바람, 석양 노을, 겨울 하늘의 별빛 같은 자연의 이미지들이 삶의 기억과 겹쳐지며 잔잔한 서정을 만들어낸다.
책은 ‘늦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깊은 용기를 건넨다. 저자는 60세에 사회복지학 석사에 도전했고, 오랜 꿈이었던 수필가의 길에도 늦깎이로 들어섰다. 삶이 끝난 줄 알았던 자리에서 다시 배움을 시작하고, 봉사하고, 글을 썼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는 단순한 성공담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은 다시 살아갈 수 있다”는 증언처럼 읽힌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지만, 인간의 외로움과 상실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런 시대에 이종옥의 산문은 거창한 해답 대신 조용한 위로를 건넨다. 가장 어두운 밤에도 별빛은 끝내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는 자신의 삶으로 증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