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2기 집권으로 전후 80년간 유엔과 다자기구를 중심으로 유지돼온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붕괴되고 미국, 중국, 러시아 3국의 ‘세력권 국제질서’로 재편되고 있다는 진단이 나온다.
중국의 남중국해 영유권 주장, 러시아의 크름반도 강제 병합에 이은 우크라이나 침공 등으로 조짐이 나타나던 터에 트럼프 2기 행정부가 관세 폭격, 그린란드 병합 추진, 베네수엘라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 체포 작전, 이란 공격 등으로 불을 붙였다는 것이다. 영토주권 등 규범 준수, 자유무역주의, 민주주의 등 전후 질서가 치명상을 입은 셈이어서다.
지난 23일 일본 와세다대 일미연구소가 재단법인 통일과나눔, 학봉장학회 후원을 받아 주최한 ‘동북아 정세와 한반도의 미래’ 국제심포지엄에서는 이런 세력권 국제질서의 대두 가능성에 대한 집중적 논의가 이뤄졌다.
윤영관 전 외교부 장관(현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은 기조강연에서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핵심 구성 요인들이 크게 약화되고 국제적 리더십 공백이 생기면서 힘의 논리가 규범을 대체하고 전쟁이 빈번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미국 차기 대선에서 정권 교체가 되더라도 ‘트럼프 이전’으로 돌아올 가능성은 낮고, 유럽은 이미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자립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며 “다극 질서의 등장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포스트 트럼프 시대는 미주 대륙에서 미국, 동아시아에서 중국, 유라시아에서 러시아가 독점적 영향력을 갖는 세력권 질서로 재편될 수 있다며 “이는 미국이 서반구를 확실하게 자국 세력권으로 굳힌 상태에서 더 이상 대서양과 태평양 건너편 대륙에서 짊어져야 했던 부담을 벗어버리고자 할 때 등장할 시나리오”라고 했다.
그러면서 “중국과 러시아에게는 크게 환영할 일이지만, 한국과 같은 국가에게는 엄혹한 시나리오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패권국들이 자국 영향권의 팽창을 추구하며 갈등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전쟁이 벌어졌던 과거 전례가 있으며, 세력권 최정점의 대국은 자국 세력권 내부 국가의 저항과 반발을 무력으로 억누르곤 했다는 이유에서다.
스즈키 모토시 교토대 명예교수도 “미·중·러 중심으로 세계가 3분할되려 하고 있다”며 “이렇게 되면 일본이나 한국에게는 큰 위협”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껏 신뢰해온 동맹국 미국이 동아시아를 방기할 수 있다는 공포, 상대국의 전쟁에 뜻하지 않게 연루될 수 있다는 공포가 생기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반면 임재환 아오야마가쿠인대 교수는 “중국의 공식 담론을 근거로 볼 때 중국은 오히려 세력권 개념에 회의적”이라고 말했다. 세력권 핵심 국가는 역내 국가들에게 경제·안보 분야에서 공공재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하는데, 군사력 면에서 미국에 필적할 만한 것을 제공할 수 있을지 의문이고 중국은 국익에 직결되지 않은 문제라면 깊이 관심 갖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인류 운명공동체’, ‘신형 대국관계’ 등 보편주의에 의한 논리 구성을 취하면서 세력권 구상을 냉전 시기의 잔재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임 교수는 평가했다. 그는 “중국의 대외 경제전략인 ‘일대일로’의 전개 양상을 보면 특정 지역에 한정하지 않고 각각에 맞는 글로벌 전략을 취하고 있다”며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역내에 한정시키는 논의에 동조할 만한 메리트가 없다”고 부연했다. 오히려 미국을 ‘국제질서 파괴범’으로 자리매김하면서 글로벌사우스 전반의 주도권을 확보하는 쪽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높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윤 전 장관은 이에 대해 “중국을 대할 땐 레토릭과 실제 행동의 차이를 들여다 봐야 한다”고 반박했다. 그는 “대만 문제를 중국의 핵심이익이라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지역 세력권을 염두에 둔 것”이라며 “대만이 무너지면 서태평양이 중국 영향권에 들어간다”고 지적했다.
이어 “신형 대국관계라는 것도 동아시아·서태평양 지역에서 중국의 이익을 인정하면, 미국의 지역적 이익을 인정해 주면서 평화·공존이 가능하다는 구상이 밑바닥에 깔려 있다”며 “(중국은) 말로는 글로벌 차원의 보편적 가치를 주장하지만, 실제 배후에 깔린 행동 논리는 지역적 차원의 세력 확보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