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희 “내가 미국인이라면 평양에 맥도날드부터 열겠다”

“제가 미국인이라면 평양에 맥도날드 하나를 열겠어요. 젊은 세대에게 미국 문화를 보여주는 거죠.”

 

북한 최선희 외무상이 2016년 말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 직후 미국 측 인사들에게 건넸다는 이 발언은, 조엘 위트 스팀슨센터 석좌연구원의 신간 ‘폴아웃(Fallout)’에 담긴 여러 흥미로운 일화 가운데 하나다. 당시만 해도 북·미 관계는 극도로 냉각돼 있었다.

 

오바마 행정부가 인권 문제를 이유로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제재 대상에 올리면서 양측 관계는 사실상 단절 상태에 가까웠다. 당시 최선희는 지금처럼 외무상을 맡기 전으로, 외무성 북아메리카국장을 지내고 있었다. 북한은 새롭게 출범할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정책 기조를 파악하기 위해 다양한 접촉 채널을 넓혀가고 있었다.

최선희 북한 외무상. 타스연합

최선희 당시 외무성 국장은 전직 미 정부 관계자들이 참여하는 트랙2(Track 2) 회의 참석을 위해 제네바를 찾았고, 이른바 ‘맥도날드 발언’도 이 자리에서 나온 것으로 전해진다.

 

최근 국내에 출간된 ‘폴아웃’은 30여 년에 걸친 북핵 협상 경험과 300건 이상의 인터뷰를 토대로 북·미 협상의 막전막후를 풀어낸 책이다. 저자인 위트 석좌연구원은 1994년 북·미 제네바합의 당시 미국 협상대표단에 참여했던 인물로, 이후에도 북한 당국자들과 비공개 접촉을 이어온 대표적인 한반도 전문가다. 그는 2016년 말 제네바에서 최선희를 직접 만난 인물 가운데 한 명이기도 하다. 책은 레이건 행정부부터 트럼프 1기 행정부까지 이어진 미국의 대북 협상사를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부분은 2019년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을 둘러싼 서술이다. 기존에는 실무 협상 미비 때문에 정상회담이 결렬됐다는 평가가 적지 않았지만, 위트 석좌연구원은 오히려 북·미 실무 협상이 상당한 수준까지 진전돼 있었다고 서술한다. 책에 따르면 양측은 핵시설 폐기 범위와 검증 방식을 놓고 상당히 구체적인 협의안까지 마련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영변 핵시설 협상이다. 최선희는 영변 전체 시설을 폐기 대상에 포함할 수 있다는 입장을 미국 측에 전달했고, 스티븐 비건 당시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는 이를 두고 “비로소 미국이 요구해온 수준의 답변”이라며 만족감을 나타냈다고 한다. 영변이 단일 시설이 아닌 복합 핵 인프라라는 점에서, 어떤 시설을 폐기 대상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이른바 ‘개념 협상’이 핵심 쟁점이었다는 설명도 흥미롭다.

 

책 곳곳에는 협상장 안팎의 긴장감과 북·미 간 미묘한 신경전을 보여주는 대목들도 등장한다. 협상 과정에서 김영철 당시 노동당 부위원장은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 측 협상단 내부에 중국 정보원이 있다고 주장하며, 중국계 미국인인 알렉스 웡 당시 대북특별부대표(트럼프 2기 초대 국가안보 수석부보좌관)를 지목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폼페이오 장관은 미소를 지은 채 “미국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라고 짧게 응수했다고 저자는 전한다.

 

책은 당시 북한이 ‘스냅백(snapback) 제재’ 수용 의사를 내비쳤다는 점도 소개한다. 스냅백은 합의가 이행되지 않을 경우 제재를 자동 복원하는 장치로, 2015년 이란핵합의(JCPOA)에도 포함됐던 방식이다. 이는 북한 역시 단계적이면서도 포괄적인 협상 틀 자체는 받아들일 의사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으로 읽힌다. 동시에 협상 일부가 틀어질 경우 모든 합의를 원점으로 되돌리는 이른바 ‘빅딜’ 방식이 애초부터 북·미 간 현실적인 해법이 되기 어려웠음을 시사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저자는 결국 하노이 회담 결렬의 직접적 계기가 트럼프 대통령이 회담장을 떠난 데 있었다고 분석한다. 북·미 실무 협상이 실제로는 상당 부분 진척돼 있었음에도 정상 간 정치적 결단 단계에서 합의가 무산됐다는 것이다.

 

책은 북·미 관계가 실제 정상화 직전 단계까지 접근했음을 보여주는 여러 장면도 소개한다. 북·미 양측은 워싱턴과 평양에 각각 연락사무소를 설치하기로 의견을 모았으며, 미 국무부는 평양에 파견할 외교관 인선 작업에도 착수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북한 측은 스티븐 비건 당시 미국 국무부 대북특별대표를 데리고, 훗날 미국 외교관들이 머물게 될 옛 동독 대사관 건물을 둘러보게 하기도 했다.

 

문화 교류 구상도 구체적으로 추진됐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오래전부터 희망해왔던 평양국립교향악단의 미국 공연이 실제 추진됐다는 점도 책에서 확인된다. 비건 대표 측은 워싱턴의 케네디센터와 접촉해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1주년인 6월12일 공연 개최를 검토했다고 한다.

 

책은 과거 회고에 머물지 않는다. 위트 석좌연구원은 2025년 미국·우크라이나 간 희토류 협력 모델이 향후 북한과의 경제협력에도 응용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광물 개발 수익 일부를 북한 경제 현대화 기금으로 적립하는 방식이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북·미 수교와 대북 제재 완화가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최종건 외교부 제1차관과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부장관 겸 대북특별대표가 2020년 12월9일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회담에 앞서 기념촬영을 마친 뒤 이동하고 있다. 뉴시스

이번 한국어판 번역진 역시 눈길을 끈다. 번역은 문재인 정부 시절 외교부 제1차관을 지낸 최종건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와 한석표 국방부 전략사령부 전략기획과장이 맡았다. 최 교수와 한 과장은 문재인 정부 청와대 국가안보실에서 함께 근무한 인연이 있다. 최 교수가 국가안보실 군비통제비서관으로 재직하던 당시, 한 과장은 군비통제비서관실 행정관으로 근무했다.

 

북핵 협상은 실패와 교착의 역사로 기억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폴아웃’은 그 이면에서 실제로는 상당한 수준의 접점과 가능성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북·미 관계가 왜 번번이 마지막 문턱을 넘지 못했는지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