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 입구에서 포토카드 한장을 받았다. 영화 ‘와일드 씽’(6월 3일 개봉) 시사회장에 들어서며 손에 쥔 것은 배우 오정세의 극 중 캐릭터 ‘최성곤’ 포토카드였다. 중단발 생머리, 한쪽 눈을 가린 앞머리, 순백색 상의, 아련한 듯 몽롱한 눈빛. 기름진 버터 조각을 손에 쥔 듯한 기분에 “뭘 이런 걸 다” 싶었지만, 영화를 보고 나온 뒤에는 결국 포토카드를 지갑 속 깊숙이 보관하게 됐다. 극 중 최성곤의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니가 좋아 / 니가 예뻐서 좋아 / 니가 착해서 좋아 / 니가 좋아 죽겠어…”
단순하고 유치한 가사가 이상하게 귀에 맴돈다. 영화 속 20년 전 최성곤은 한 시대를 풍미한 ‘발라드 왕자’다. 무대 위에서 촉촉한 눈빛으로 관객을 바라보며 노래하는 모습, 거기에 곁들이는 능청스러운 손 율동은 1990년대 말~2000년대 초 음악방송의 정서를 절묘하게 복원한다.
그러나 최성곤은 비운의 인물이다. 음악 프로그램에서 무려 38주 연속 2위를 기록했지만, 끝내 라이벌 그룹 ‘트라이앵글’을 넘지 못한 채 ‘39주 연속 2위’라는 희한한 기록만 남긴다. 이후 불미스러운 사건에 휘말려 스포츠신문을 장식하고 연예계를 떠난다.
20년 후 등장한 최성곤의 모습은 충격적이다. 화려한 조명 아래 마이크를 잡던 남자는 사라지고, 짙은 숲 속에서 사냥총을 멘 채 야생을 떠도는 사냥꾼이 남아 있다. 거친 곱슬머리와 덥수룩한 수염, 볕에 그을린 얼굴까지. 더는 ‘발라드 왕자’의 흔적은 없다. 여심을 흔들던 스타에서 자연인이 된 그의 삶에는 묘한 비애가 감돈다.
오정세가 연기하는 최성곤은 관객이 아무리 기분이 가라앉은 상태로 극장에 들어가더라도 적어도 두세 번은 배를 잡고 웃게 만드는 힘이 있다. 과장과 절제의 경계를 자유롭게 오가며, 우스꽝스럽지만 응원하고 싶어지는 인간의 얼굴을 만들어낸다.
‘와일드 씽’을 연출한 손재곤 감독은 28일 인터뷰에서 “오정세와 경력을 비슷한 시기에 시작해 서로 오래 봐왔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존재감이 달라졌다는 걸 느꼈다”고 했다. 단순히 인기가 많아졌다거나 나이가 들었다는 차원이 아니라는 설명이 이어졌다. “‘그의 연기’를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매 장면마다 엄청난 고민과 아이디어를 쏟아붓더라. 많은 작품을 하는데 작품마다 저렇게 에너지를 쏟는다고 생각하니 걱정이 되기도 했다.”
실제 영화 속 많은 장면은 오정세의 아이디어가 더해지며 훨씬 살아났다고 했다. 손 감독은 “오정세가 매 장면마다 아이디어를 추가했고, 그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효과가 극대화된 장면이 많았다”고 밝혔다.
오정세는 24일 종영한 JTBC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에서 지질하지만 미워하기 힘든 영화감독 박경세 역으로 호평받은 데 이어, 22일 시작한 MBC 새 금토극 ‘오십프로’에서는 북한 특수 공작원 출신 봉제순 역으로 또 다른 얼굴을 보여주고 있다. 말 그대로 쉼 없는 행보다. 그렇게 다작을 이어가고 있음에도 ‘오정세 같다’는 느낌보다 박경세와 최성곤, 봉제순이라는 각기 다른 인물이 또렷하게 남는다.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다. “오정세, 니가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