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만 했을 뿐인데 지갑이 열린다…러닝족 붙잡는 유통가

주말 아침 한강변과 도심 공원에는 운동화 끈을 묶는 사람들이 일찍 모인다. 예전처럼 기록표만 바라보며 혼자 뛰는 분위기와는 다르다. 사진을 찍고, 모임에 들어가고, 여행지에서도 러닝 코스를 먼저 찾는다.

 

한화호텔앤드리조트 제공

러닝은 이제 운동을 넘어 소비가 붙는 취향이 됐다. 공식 통계에서도 변화는 확인된다.

 

31일 문화체육관광부 ‘2025년 국민생활체육조사’에 따르면 규칙적 체육활동 참여자 가운데 달리기·조깅·마라톤을 한다고 답한 비중은 2024년 4.8%에서 2025년 7.7%로 올랐다. 걷기, 보디빌딩, 등산, 요가·필라테스, 수영에 이어 6위다.

 

숫자가 커지자 업계의 시선도 달라졌다. 러닝은 더 이상 스포츠 브랜드만의 영역이 아니다. 호텔, 여행, 홈쇼핑, 식품기업까지 러닝을 앞세워 고객을 만나고 있다.

 

가장 빠르게 움직이는 곳은 관광·호텔업계다. 이들은 달리기와 여행을 결합한 ‘런트립’ 상품으로 지역 관광 수요를 끌어내고 있다.

 

한화호텔앤드리조트는 한국관광공사와 함께 ‘2026 Run & Sea in 강원-양양 속초 바다 런트립’을 선보였다. 한화리조트 설악 쏘라노를 거점으로 숙박, 식사, 러닝 프로그램, 투명 카약 체험, 사우나를 묶은 숙박형 프로그램이다.

 

단순히 리조트에 묵는 상품이 아니다. 양양 낙산 해변과 낙산사, 남대천 생태공원, 영랑호와 동해안 코스를 달리며 지역 풍경을 몸으로 경험하는 방식이다. 관광지는 보는 곳에서 뛰어보는 곳으로 바뀌고 있다.

 

이 흐름은 데이터로도 잡힌다. 한국관광공사 한국관광데이터랩 보고서에 따르면 2024년 기준 ‘런트립’ 관련 SNS 언급량은 2021년보다 598% 증가했다. 여행지에서 무엇을 먹고 어디를 찍느냐만큼, 어디를 달렸는지가 새로운 인증 요소가 된 셈이다.

 

업계가 런트립에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러닝은 장비 진입장벽이 낮고, 사진과 기록을 남기기 쉽다. 코스가 좋으면 지역 홍보가 자연스럽게 따라붙는다. 숙박업계 입장에서는 객실 판매에 그치지 않고 식음, 체험, 지역 관광까지 묶을 수 있는 콘텐츠가 된다.

 

유통업계는 러닝 대회를 새로운 고객 유입 창구로 보고 있다.

 

CJ온스타일은 마라톤 대회 ‘월리를 찾아라! Run with 신한카드’ 참가권을 모바일 라이브커머스에서 판매했다. 기록 단축보다 함께 뛰고 즐기는 ‘펀런’ 분위기에 맞춰 참가권 판매 자체를 하나의 방송 콘텐츠처럼 꾸민 것이다.

 

반응은 빨랐다. 방송 시작 10분 만에 약 3만뷰가 몰렸고, 모바일 라이브 방송용 5㎞ 참가권은 10분 만에 준비 물량이 모두 소진됐다. 구매 고객의 60% 이상은 30대 이하였고, 전체 구매 고객 중 80% 이상은 CJ온스타일 모바일 앱 신규 고객으로 집계됐다.

 

유통사 입장에서는 꽤 의미 있는 숫자다. 단순히 참가권 몇 장을 판 것이 아니라, 앱을 새로 설치하고 결제까지 한 고객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러닝 대회가 상품이자 광고판, 동시에 신규 고객 유입 장치가 된 셈이다.

 

특히 5㎞ 코스가 빨리 팔린 점도 눈에 띈다. 마라톤 풀코스처럼 강한 체력을 요구하는 대회보다 가족, 친구, 연인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가벼운 코스에 수요가 붙었다는 뜻이다. 러닝이 ‘잘하는 사람의 운동’에서 ‘함께 노는 일정’으로 넓어지고 있다는 신호다.

 

러닝을 ESG 활동과 연결한 사례도 있다.

 

농심은 ‘세계 꿀벌의 날’을 맞아 기부형 러닝 캠페인 ‘2026 꿀벌런’을 후원했다. 행사는 참가자가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달린 뒤 인증하는 비대면 방식으로 진행된다.

 

농심은 자사 장수 스낵 ‘꿀꽈배기’에 국산 아카시아꿀을 사용해온 점을 앞세웠다. 참가자 러닝 패키지에 꿀꽈배기 1000봉을 지원하고, 꿀벌 생태계 보호 메시지를 함께 전달했다. 참가비 수익금 전액은 기후위기 대응 활동에 쓰일 예정이다.

 

이 방식은 일반적인 제품 홍보와 조금 다르다. 소비자에게 “사라”고 말하기보다, 브랜드가 어떤 가치와 연결돼 있는지를 보여준다. 러닝은 그 메시지를 가볍게 전달하는 통로가 된다.

 

요즘 소비자는 행사에 참여하면서도 이유를 본다. 왜 이 브랜드가 이 대회를 여는지, 왜 이 상품이 러닝 패키지에 들어가는지 따진다. 농심의 꿀벌런 후원은 제품 원료와 사회적 메시지를 연결했다는 점에서 단순 협찬보다 설명력이 있다.

 

러닝 마케팅이 커지는 배경에는 2030세대의 소비 방식 변화가 있다. 이들은 제품만 사지 않는다. 경험을 사고, 사진을 남기고, 함께할 사람을 찾는다. 운동도 예외가 아니다.

 

혼자 기록을 줄이는 러닝도 여전히 있다. 하지만 최근의 확산세는 조금 다르다. 퇴근 후 러닝크루에 나가고, 주말에는 지방 대회나 해변 코스를 찾아가고, 참가권을 라이브 방송에서 산다. 러닝화 한 켤레에서 시작한 소비가 숙박, 교통, 식음, 굿즈, 앱 가입으로 번진다.

 

기업들이 러닝을 붙잡는 이유는 명확하다. 러닝은 건강, 여행, 놀이, 가치소비를 한 번에 묶을 수 있는 드문 소재다. 소비자가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스스로 기록을 남기며, 주변에 공유한다. 광고보다 오래 남는 접점이 만들어진다.

 

다만 러닝 열풍이 모든 브랜드에 맞는 만능 키는 아니다. 억지로 대회 이름만 붙이면 금방 티가 난다. 코스, 안전, 참가자 경험, 브랜드와의 연결성이 맞아야 한다. 뛰는 사람은 생각보다 빨리 알아차린다. 이 행사가 나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내 사진과 기록만 필요한 행사인지.

 

한 유통업계 관계자는 “러닝은 이제 단순한 스포츠 이벤트가 아니라 고객이 직접 움직이고 공유하는 참여형 콘텐츠가 됐다”며 “브랜드가 이 흐름을 활용하려면 판매보다 경험 설계를 먼저 봐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