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리 이사국 탈락… 독일의 ‘굴욕’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박수길 전 주(駐)유엔 대사는 1995년 1월부터 1998년 4월까지 유엔에서 한국을 대표했다. 그의 임기 도중인 1996년 1월1일 한국이 사상 최초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비상임이사국이 돼 2년 임기를 시작했다. 1991년 9월에야 유엔에 가입한 신참 회원국으로서 대단한 외교적 성과가 아닐 수 없다. 박 대사는 훗날 회고록에서 “당장 미국이 한국을 대하는 태도부터 달라졌다”며 “주유엔 대표부의 한국 외교관들이 미국 국무부에 초청돼 유엔 안보리 현안에 관한 브리핑을 듣는 등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고 술회했다. 그 뒤로도 한국은 2013∼2014년, 2024∼2025년 이렇게 두 차례 더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임무를 수행했다.

독일의 상징인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독일 통일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의 예행 연습이 한창이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안보리는 유엔에서 무력 행사 등 구속력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다. 거부권(veto power)을 지닌 미국·영국·프랑스·중국·러시아 5개 상임이사국에 거부권이 없는 10개 비상임이사국을 더한 15개 이사국으로 구성된다. 10개 비상임이사국은 유엔 총회에서 비밀 투표로 선출한다. 물론 비상임이사국의 권한은 상임이사국에 훨씬 못 미친다. 그래도 안보리 회의에 참여해 의견을 개진하고 의장국도 맡을 수 있다는 점에서 세계 모든 나라가 비상임이사국 지위를 선호한다. 1956년 유엔 회원국이 된 일본의 경우 지난 70년 동안 무려 12차례나 비상임이사국을 역임했다. 가장 최근에는 2023∼2024년 안보리를 지켰다.

 

유엔은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을 일으킨 나라들을 겨냥해 창설된 국제기구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2차대전 전범국인 독일도 유엔 가입이 다른 국가보다 늦었다. 동·서독으로 분단돼 있던 1973년 나란히 유엔 회원국이 됐고, 1990년 독일 통일에 따라 옛 동독은 독일에 흡수됐다. 반세기 넘는 기간 동안 독일은 총 6차례에 걸쳐 안보리 비상임이사국으로 활동했다. 가장 최근에는 2019∼2020년 비상임이사국 임기를 수행하며 안보리 의사 결정 과정에 관여했다. 이미 6년가량 시간이 흐른 만큼 독일은 7번째 안보리 진출을 노리며 국제사회를 상대로 선거 운동에 공을 들였다.

미국 뉴욕에 있는 유엔본부 내 안보리 회의장 모습. 15개 이사국으로 구성되는 안보리는 유엔의 여러 기관들 가운데 무력 행사 등 구속력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3일 미국 뉴욕의 유엔본부에서 오는 2027년 1월1일부터 활동할 2년 임기의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선출을 위한 투표가 실시됐다. 그 결과 포르투갈, 오스트리아, 키르기스스탄, 트리니다드 토바고, 짐바브웨 5개국이 안보리 합류를 확정 지었다. 유럽 등 서방 국가들 몫으로 할당된 2자리를 놓고 포르투갈 및 오스트리아와 치열하게 경합한 독일은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진출을 자신의 외교 치적으로 삼으려던 프리드리히 메르츠 총리는 뒤통수를 맞은 셈이 됐다. 선거 운동을 진두지휘한 요한 바데풀 외교부 장관은 “정말 실망스럽고 씁쓸한 패배”라며 고개를 숙였다. 미국, 중국에 이은 세계 3위 경제 대국 독일이 상상조차 하기 힘든 외교 참사를 겪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