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고뉴 화이트 와인의 귀족, 뫼르소 [최현태 기자의 와인홀릭]

<2026 그랑주르 드 부르고뉴를 가다 ⑤ 뫼르소>

구운 아몬드·헤이즐넛·버터 향에 실키한 질감
쥐라기 석회질 마른 토양이 빚어낸 귀족적 화이트
그랑크뤼 없지만 뛰어난 1er 크뤼 클리마 19개 달해
샤토 드 뫼르소. 최현태 기자

눈을 감고 와인 잔에 코를 천천히 갖다 댑니다. 처음엔 은근히 올라오는 구운 아몬드 향. 잔을 살며시 흔들면 헤이즐넛 향이 더욱 진하게 피어오릅니다. 곧이어 산사나무 꽃향과 엘더플라워, 라임꽃의 섬세한 꽃향이 비강을 간지럽히더니, 부싯돌을 스치는 듯한 미네랄 향이 고요하게 배경을 채웁니다. 한 모금 머금자 풍부하고 농밀한 질감이 입 안 가득 펼쳐지면서 기분 좋은 헤이즐넛 풍미와 함께 실키하고 점성 있는 산미가 우아하게 균형을 잡아주는군요. 특히 길고 긴 피니시. 아, 이건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부르고뉴 화이트 와인의 귀족, 뫼르소(Meursault) 입니다.

 

영화 ‘부르고뉴, 와인에서 찾은 인생’ 포스터
영화 ‘부르고뉴, 와인에서 찾은 인생’ 배경 뫼르소 포도밭과 나무. 최현태 기자

◆부르고뉴 화이트의 귀족

 

2018년 개봉 영화 ‘부르고뉴, 와인에서 찾은 인생(프랑스어 원제 우리를 이어주는 것·Ce qui nous lie, 영어 원제 부르고뉴로의 귀환 Back to Burgundy)’은 프랑스 와인의 심장, 부르고뉴 포도밭의 아름다운 사계절을 잘 담은 수작으로 평가됩니다. 영화에서 등장한 한 그루 나무가 서 있는 포도밭이 바로 뫼르소 포도밭입니다. 영화의 주무대로 등장하는 포도밭과 와이너너리는 뫼르소 마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명가 도멘 룰로(Domaine Roulot)입니다. 특히 오너이자 와인메이커이자 배우인 장 마크 룰로(Jean-Marc Roulot)로 삼남매를 묵묵히 돕는 숙련된 포도밭 관리인 마르셀(Marcel) 역으로 직접 출연해 화제가 됐습니다.

 

뫼르소 시청사. 최현태 기자
뫼르소 시청사 광장 분수 조각상. 최현태 기자

뫼르소 마을로 들어서자 오스피스 드 본처럼 화려한 유색 타일 지붕으로 꾸민 시청 건물이 눈길을 사로잡네요. 바로 앞 분수대와 어우러져 예쁜 사진을 얻을 수 있습니다. 특히 포도를 수확하는 아낙네와 아이들을 새긴 분수대 조각 작품이 와인의 본고장임을 실감하게 합니다. 시청 맞은편에는 1480년에 지은 유서 깊은 고딕 양식 생 니콜라 성당이 우뚝 서 있고, 광장에서는 장터가 펼쳐져 작은 마을이지만 볼거리가 많습니다.

 

생 니콜라 성당. 최현태 기자

퓔리니 몽라셰 바로 위쪽에 붙어있는 뫼르소는 뉘 생 조르주(Nuits-Saint-Georges) 부근에서 지하 깊숙이 사라졌던 단단한 콩블랑시앙 석회암(Comblanchien limestone)이 다시 지표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지점입니다. 꼬뜨 드 본은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레드 와인 중심에서 화이트 와인 중심 지역으로 서서히 전환되는데, 샤르도네는 바로 이 뫼르소에서 그 잠재력을 처음으로 꽃피웁니다. 1098년 시토회 수도사들이 이 탁월한 토양에 포도나무를 심기 시작한 이후, 이 작은 마을은 9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세계 최고의 화이트 와인 산지로 그 이름을 지켜왔습니다. 1937년 공식 AOC 지위를 부여받으면서 뫼르소의 명성이 완성됩니다.

 

뫼르소 AOC. BIVB

◆뫼르소 떼루아

 

최고의 뫼르소 와인이 태어나는 곳은 해발 약 260m 지점, 동쪽에서 남쪽으로 완만하게 이어지는 아크 형태의 사면입니다. 이곳에서 자란 샤르도네는 쥐라기 시대의 마른(marl)과 석회질 마른 토양, 그리고 일부 마그네슘 석회암 위에 뿌리를 내립니다. 특히 고대 칼로비안(Callovian) 석회암과 아르고비안(Argovian) 마른 토양이 겹치는 지점에서 프리미에 크뤼(Premiers Crus)급 와인이 탄생합니다. 지질학적 시간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낸 이 독특한 토양이 뫼르소 와인 특유의 미네랄 향과 복합미의 비밀입니다.

 

재배 면적은 화이트가 381ha, 레드가 10.66ha 일정도로 샤르도네가 압도적인 화이트 와인의 세상입니다. 연평균 화이트 와인 생산량이 약 1만7491헥토리터(hl)에 달하며, 그중 프리미에 크뤼급이 약 4771hl를 차지합니다.(2014~2018년 평균).

 

뱅상 지라르당 뫼르소. 최현태 기자

뫼르소는 화려한 퓔리니나 샤샤뉴처럼 크랑크뤼 밭은 하나도 없고 프리미에 크뤼 만 19개입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20세기 초·중반 부르고뉴 포도밭 등급 제정 당시, 뫼르소 지역 생산자들은 그랑 크뤼 승격 시 부과될 높은 세금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등급 신청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웃 마을인 포마르(Pommard)와 볼네(Volnay)도 같은 이유로 그랑 크뤼를 신청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페리에르(Perrières), 클로 데 페리에르(Clos des Perrières), 주느브리에르(Genevrières), 샤름(Charmes), 구트 도르(Les Gouttes d'Or) 등은 그랑크뤼에 버금가는 프리미에 클뤼로 평가됩니다. 또 최고의 뫼르소 생산자로는 코쉬 듀리(Coche-Dury), 콩트 라퐁(Comtes Lafon), 룰로(Roulot) 등이 꼽히며 이들의 와인은 전 세계 와인 애호가들 사이에서 구하기조차 힘든 귀한 보물로 통합니다.

 

뫼르소 마을과 포도밭. 최현태 기자

◆뫼르소 아로마

 

향은 클리마(Climat) 마다 미묘하게 달라지지만 뫼르소 와인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아로마들이 있습니다. 잘 익은 포도의 풍성한 아로마, 구운 아몬드와 헤이즐넛, 버터와 꿀, 시트러스 계열의 향, 그리고 산사나무꽃·엘더플라워·고사리·라임꽃·버베나 같은 꽃향이 어우러집니다. 부싯돌을 연상시키는 미네랄 뉘앙스도 뫼르소의 트레이드마크랍니다.

 

입안에서는 풍부하고 농밀한 질감이 먼저 인사를 건넵니다. 점성 있는 실키한 질감과 신선한 산미가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길고 구조감 있는 피니시가 오래도록 여운을 남깁니다. 뫼르소는 서두르면 안 됩니다. 충분한 셀러링을 거친 뒤 즐겨야 그 진가가 드러나는 장기 숙성형 위대한 화이트 와인이랍니다. 한 잔의 뫼르소를 천천히 음미하다 보면 900년의 시간이 빚어낸 부르고뉴 땅의 정수가 혀 위에서 살아 숨쉬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뫼르소 포도밭 십자가. 최현태 기자

◆랍스터부터 푸아그라까지, 귀족의 식탁

 

뫼르소는 풍부한 향과 뛰어난 산도·질감의 균형 덕분에 부르고뉴 화이트 가운데서도 귀족적인 존재로 평가받습니다. 음식의 맛을 압도하지 않으면서도 품격 있게 어우러지는 점이 뫼르소의 매력입니다. 특히 구운 랍스터, 가재, 소스를 곁들인 킹프론과의 조합은 환상적입니다. 해산물 요리의 강한 풍미와 탄탄한 식감이 와인의 생동감 넘치는 밸런스와 이상적으로 맞아떨어지기 때문입니다. 화이트 소스를 곁들인 송아지 고기 요리나 고급 가금류 요리와도 훌륭한 궁합을 보여줍니다. 와인의 부드럽고 점성 있는 질감과 길고 우아한 산미가 요리의 풍미를 한층 끌어올립니다. 블루 치즈나 푸아그라와 즐기는 뫼르소도 특별한 경험입니다. <2026 그랑주르 드 부르고뉴를 가다 ⑥에서 계속> 

 

최현태 최현태 기자는 국제공인와인전문가 과정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 레벨3 Advanced, 프랑스와인전문가 과정 FWS(French Wine Scholar), 뉴질랜드와인전문가 과정, 캘리포니아와인전문가 과정 캡스톤(Capstone) 레벨1&2를 취득한 와인전문가입니다. 매년 유럽에서 열리는 세계최대와인경진대회 CMB(Concours Mondial De Bruselles) 심사위원, 소펙사 코리아 소믈리에 대회 심사위원을 역임했고 2017년부터 국제와인기구(OIV) 공인 아시아 유일 와인경진대회 아시아와인트로피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보르도, 부르고뉴, 상파뉴, 루아르, 알자스와 이탈리아, 포르투갈, 호주, 독일, 체코, 스위스, 조지아, 중국 등 다양한 국가의 와이너리 투어 경험을 토대로 독자에게 알찬 와인 정보를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