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중국과의 경쟁에서 뒤처질 수 없다”며 인공지능(AI) 기업 규제 행정명령을 철회한 뒤 2주만에 새로운 규제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AI 모델을 공개하기 전 최대 90일간 정부에 접근권을 제공하는 ‘자발적 감독 체계’를 담았던 초안을 축소해, 최대 30일간 정부와 정보를 공유하도록 한 절충안에 서명한 것이다.
2주 전 초안이 막판에 철회된 것은 실리콘밸리의 벤처투자자 출신인 데이비드 색스 대통령 과학기술자문위 공동의장(전 백악관 AI·가상자산 차르)이 AI 규제 명령에 ‘결사 반대’했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색스로 대표되는 실리콘밸리 업계가 원하는 것과 달리 ‘절충안’으로라도 결국 감독 체제가 도입됐다는 점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당초 입장을 후퇴시킨 것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임 조 바이든 행정부와 달리 AI 규제에 매우 부정적이었지만, 최근 앤트로픽의 ‘미소스’ 등 강력한 AI 모델이 등장하면서 일정 정도의 AI 규제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결국 절충안 손 들어준 트럼프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2일(현지시간) 서명한 행정명령은 AI 기술에 대한 연방정부의 감독을 강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바이든 행정부에서 AI 관련 행정명령이 나온 적이 있지만, 트럼프 행정부 2기에서는 거의 1년 5개월만에 나온 첫 연방 차원의 AI 감독 조치다.
이 행정명령은 AI 모델을 공개하기 전 30일 전에 정부가 접근해 취약점을 해결하고, 정부가 민간 기업과 협력해 국가 사이버안보를 보장해야 한다는 내용이 골자다. 다만 이러한 조치가 AI 개발 허가제, 정부 사전 승인제 등을 허용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고 못박았다.
당초 AI 모델 공개 전 90일간 정부가 접근권을 갖도록 한 것을 30일로 대폭 줄인 것은 색스가 막판 개입한 결과로 알려졌다. 백악관은 지난달 21일 첫 행정명령을 준비한 뒤 AI 기업 관계자들을 불러 서명식을 계획했으나 막판 취소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당시 “우리가 가진 (AI 분야) 선두를 방해하는 어떤 일도 하고 싶지 않다”며 일부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색스는 페이팔 창업자·임원들의 비공식 네트워크를 의미하는 이른바 ‘페이팔 마피아’ 출신으로, 지난 대선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한 실리콘밸리 내부의 네트워크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이들은 중국과의 AI 경쟁에서 앞서나가기 위해 지나친 규제가 없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 폴리티코 등에 따르면 색스는 자발적 모델 검증 제도가 결국 의무규제로 이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의 안보 관련 당국자들은 AI 규제를 전면 찬성하는 것은 아니라도 일정 정도의 규제가 필요하다고 보는 것으로 전해졌다. 션 케언크로스 국가사이버국장은 지난해 12월 워싱턴에서 열린 ‘애스펀 사이버 서밋’에서 트럼프 행정부가 사이버안보와 관련 “단일되고 조정된 전략”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는데, 행정부가 내세우는 기술 발전과 사이버 안보 사이에 트럼프 행정부가 겪고 있는 딜레마를 보여준다. 특히 이번 행정명령의 도입 국면에서 케언크로스 국장과 국가 안보 담당 당국자들은 AI의 잠재적 위험에 대응하기 위해 일정 수준의 규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해온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주 새로운 행정명령이 나오기 전 1일 백악관 회의에는 피트 헤그세스 국방부 장관,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 등이 참여한 것으로 전해졌는데, 베선트 장관 역시 앤트로픽의 미소스 등 새로운 AI 모델들이 금융 시스템에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해왔다. 색스는 이 회의에 전화로 참여해 절충안에 동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행정명령을 주도한 마이클 크라치오스 백악관 과학기술정책실장은 “이번 조치는 미국이 AI 분야에서 선두를 유지하면서도 이러한 최첨단 역량을 우리의 사이버 방어 강화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말했다.
◆안보 우려·여론에 입장 후퇴
기술기업계는 일단 공개적으로는 이번 행정명령에 환영한다는 입장을 내놓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브래드 스미스 사장 겸 부회장은 이번 행정명령을 환영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를 지지한 기술기업계의 반규제론자들 사이에서는 실망감이 적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WSJ는 “색스를 비롯해 거의 모든 비용을 감수하더라도 AI 배치를 가속화하려는 세력에게는 후퇴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평가했다.
워싱턴 싱크탱크 미국혁신파운데이션(Foundation for American Innovation)에서 활동 중인 딘 볼 전 백악관 과학기술정책실 AI·신흥기술 선임 정책고문은 “이번 조치는 결국 AI 모델 허가제로 이어질 수 있으며, 혁신을 저해할 위험이 있다”고 비판했다. 또 이번 행정명령이 어떤 AI 도구가 사전 검토 대상이 되는지, 정부가 어떤 기준으로 결정할 것인지도 불분명하다고 꼬집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당초 AI 규제에 비판적 입장이었으며, 바이든 행정부의 AI 규제 방침을 비판해왔다. 하지만 축소된 형태로라도 AI 규제를 도입한 것은 국가 안보와 관련한 현실적인 필요성과 함께 미국 여론이 AI 규제에 친화적이라는 점도 한 몫 했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갤럽 조사에 따르면 미국 성인의 80%가 AI 발전 속도가 느려지더라도 정부가 AI를 규제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당초 첫번째 행정명령을 준비할 당시 서명식을 계획했지만, 이번에는 서명식을 열지 않고 ‘조용히’ 서명했다.
민주당은 이번 행정명령이 효과적으로 AI를 규제하지 못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AI 관련 의원 모임을 공동 이끌고 있는 민주당 소속 돈 베이어 하원의원(버지니아)은 “이번 정책은 기대 이하이며, AI 개발을 사실상 무법지대로 만드는 트럼프 행정부의 광범위한 패턴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지적했다.